내 세계가 크게 소용돌이 치던 그 순간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해
캄보디아. 처음 그 곳에 발을 내딛을 당시 나는 열 다섯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공항에 세 번이나 더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프놈펜공항은 인천공항과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작았고, 나는 비자를 받기 위해 바글대는 무리 속에 금새 파묻혔야했다. 눈이 휘둥그레해질만한 크고 번쩍이는 비자가 여권에 찍혔고 짐을 끌고 나오자 후끈한 공기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던 운전기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 손에 끌려 비행기를 처음 타 봤을 때를 제외하면, 캄보디아는 나의 첫 해외경험이었다. 아동인권에 대해 공부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무장한 나였지만, 뜨거운 날씨와 낯선 활자들 그리고 여기 저기서 빵빵대는 오토바이 경적소리는 여긴 내가 사는 그 곳이 아니구나, 다른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자꾸 상기시켰다. 그리고 나를 몹시 설레게했다.
묵던 숙소에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던 도마뱀에 신기해하고 시원한 생과일 쥬스를 쪽쪽 빨며 거리를 돌아다니던 몇 일이 흘렀다. 여기 사람들은 참 친절하고 착하고 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 구걸하러 달려드는 꼬마아이들을 비롯한 사람들을 보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하지 않은 첫 몇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뚜얼 슬렝 대량학살 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을 방문했다. 나와 동행들은 실제 뚜얼 슬렝에서 가족을 잃은 가이드와 함께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끔찍했다. 너무도 무서웠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나갔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캄보디아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폴 포츠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인구 800만명 중 170만-250만이 대량학살 당하는 '킬링필드' 라는 아픈역사를 겪었다. 인구의 1/4 가량이 넘는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같은 국민에 의해 죽임당한것이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팔 다리를 잃은 사람들도, 마땅한 옷을 걸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다 쓰러져가는 학교도. 전쟁이 휩쓸고 간 땅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캄보디아는 0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다.
2010년의 캄보디아는 전쟁의 흉터와 또 희망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어떤 이들이 나라를 끝 없는 절망과 고통으로 이끌었다면, 어떤 이들은 다시 밝은 미래를 위해 인생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0년 당시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NGO들이 활동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내 나라를 위해, 심지어는 내 나라가 아닌 그 곳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캄보디아 아이들으 초등학교 진학률 뿐만 아니라, 내 인생도 바꾸어 놓았다.
가히 충격적이었다. 남을 위해 내 인생의 시간과 열정을 쏟는 사람들. 왜? 어째서? 아니 어떻게?
어린 나이였지만 중학생이었던 나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보다 나은' 점수를 받아야 '남들보다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도와야 한다는 것 또한 배우며 자랐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네 세상에서 인생의 방향은, 경쟁해서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정해져있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었던 때였다.
그런 나에게 부자 나라에서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아직까지 폐허의 모습이 있는 캄보디아에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삶의 방향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나 한사람을 위해 피땀 쏟는 삶은 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사람들을 살리고 변화의 씨앗이 되어 오래동안 남을 것이다. 이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중학생의 나는 당장 무엇이라도 시작해야할 것 같았다. 들뜬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온 얼마 뒤 캄보디아에 도서관을 짓는 일에 동참하였고 그 일로 캄보디아를 2014년까지 매 년 방문하였다. 도서관이 완공되고, 그 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더 큰 꿈을 꾸게되는 교사들을 보았다. 하지만 해가 갈 수록 이 전쟁은, 가난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며 왜 우리는 같은 지구에 발을 딛고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가 궁금해졌다.
이후 여행은 나에게 생각을 하듯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도서관 일로 캄보디아에 방문했던 2014년 겨울, 여행사의 실수로 나의 목적지인 시엠립이 아닌 프놈펜 공항을 향하는 표를 발권받았다. 바보 같이 중국 상하이를 경유하는 와중에 이를 깨달은 나는,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일행은 시엠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프놈펜은 시엠립에서 차로 7시간이 넘게 떨어져있는 도시다.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하나, 생각하던 차에 선교 차 프놈펜에 살고 계시는 분을 만났고 그 집에 그 분의 가족들과 하루 머물게 되었다. 감사한 마음에 혹시나 도울 것이 있나 여쭤봤더니 놀랍게도 도서관을 지으려 준비 중이시라고 하셨다. 한국에 돌아가 그 가족 분들께 전해드릴 영문도서를 열심히 모았고 천 권이 넘게 모이는 책들을 보며, 처음 캄보디아에서 느꼈던 그 마음들, 그 생각들이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캄보디아는 나에게 그런 나라다. 다시 대학에서 공부하고, 학점을 위해 경쟁하고, 취업을 생각하며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끙끙 앓고 있을 때에, 내가 속해 있는 이 작은 사회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경종을 울려주는 그런 기억. 세상을 넓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며, 지금 내 눈 앞의 엄청나보이는 걱정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등대같은 기억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쟁취하는 것 보다 세상에는 보고 경험해야 할 것이 많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 어쩌면 해야하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알게해준 캄보디아, 내 모든 여행의 시작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