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홍제역 3번 출구 옆, 노약자용 엘리베이터 앞에 야구 모자 청년이 짝다리로 서 있다. 자동문이 열리자 냉큼 들어간다. 정작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들은 느릿느릿 그다음에 오른다. 마음속 법복을 입은 나는 땅땅땅 망치를 세 번 내리친다. ‘유죄! 너는 게으르고 배려 없는 인간이다!’
사람마다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다. 덕분에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고, 그 기준에 맞춰 살 때 더 만족스럽다. 개인적인 기준이 과해지면 '당연하다'는 확신이 된다. 타인이 그 잣대를 벗어난 모습을 보면 쉽게 판단하고 비난한다. 나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당위라고 주장하지만, 타인에 대한 판단이 많으면 부딪히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자기 잣대의 골방, 판단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어른을 보면 어린 사람이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먼저 본 사람이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집안일하고 식사 차리는 것은 당연히 주부의 역할이지.
함께 직장 다니니까 가사를 분담하는 게 당연하잖아.
나의 당연함을 타인에게 요구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때 당연했던 것이라도 지금은 당연하지 않고, 나의 필연이 남에게는 우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을 고집하고, 타인을 정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신 승리? 내가 옳다고 이겨도 진정 이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잃기 때문이다. 타인을 유죄라고 판단하고 싶을 때,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내 주장이 정말 옳을까?
모든 지역,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합당할까?
그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의 행동이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일까?
객관적인 성찰을 거치지 않으면 판단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 안에서 혼자 의인이 된 것 같지만,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타인과의 연결은 깨진다.
다행히 최근 약간의 아픔을 겪으며 판단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선 날이었다. 도로 저만치 오는 마을버스를 보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너뛰는데 갑자기 다리가 꺾이며 왼쪽 무릎 안쪽에서 '투둑'하는 느낌이 들었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한동안 걷기도 힘들었다. 특히 계단에서는 내려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무릎이 아팠다. 지하철을 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할머니들 틈에서 승강기를 기다릴 때, 누군가 나를 보고 손가락질할 것 같아 괜히 낯이 뜨거웠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노인들을 위한 승강기를 타네. 게으른 놈 같으니...' 바로 며칠 전에 내가 야구모자 청년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 일을 당하고 나니 타인을 판단하고 싶을 때 나의 해석이 과연 옳은 지 살펴보게 되었다. 내 당위에서 벗어나는 일을 보면 '오죽하면 저럴까?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겠지'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알고 보면 모든 행동에는 긍정적인 의도가 있다. 다만 자신만 알고, 타인은 모를 뿐이다.
미팅 시작 3분 남은 상황이었다. 엘리베이터 세 개 층 더 지나 서둘러 가면 제시간에 도착할 정도니 문만 열리면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데 2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검정 원피스 30대 여성이 천천히 들어왔다. 아니 2층에서 1층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탄다고? 뒤통수를 째려보며 유죄 선고를 내리려는 본능을 느낄 때, 성경 말씀을 새겨본다.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야고보서 4:12)
그래 내가 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엘리베이터는 타라고 만든 거잖아. 나나 잘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