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은 회의실 창 밖으로 은행잎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이파리들 사이로 드문 드문 노란 이파리가 눈에 띈다.
유 코치와의 세 번째 세션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네, 코치님. 뭐 늘 바쁘네요.”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번 세션과 관련하여 그동안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강일은 지난 세션이 무엇이었던가 생각을 더듬었다. ‘그래 대화의 독에 관련한 것이었지.’
“아, 네. 네 가지 대화의 독에 대해 배웠죠. 며칠 동안 제가 얼마나 많은 독을 쓰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맨날’, ‘항상’, ‘언제나’ 같은 말을 쓸 때마다 핸드폰이 삑삑 울려대서요. 덕분에 제가 쓰는 말을 조금 의식하게 되고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효과 있던데요.”
“그렇죠. 자신이 하는 말을 의식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겠습니다. 사모님께 대화의 독에 대해 설명드리라는 과제도 있었죠?”
“네, 주신 읽을거리를 보고 아내에게 숙제를 했어요. 아내도 그런 게 다 있냐고, 자기도 말을 조심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노력하는 부분에 대해서 아내도 관심을 갖고 고마워해서 나름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민기와는 아직 서먹 서먹해요. 아직도 좀 불편하네요.”
“사모님과 좋은 시간을 가지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자기가 가진 지식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으면 그것이 더욱 자기 것이 되는 효과도 있답니다. 한데, 아드님과 관련된 부분은 아직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군요.”
“네, 아들에게 비난이나 경멸을 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오늘 아침도 학교 갈 시간이 다 됐는데도 방에서 안 나오길래 들여다봤더니 또 스마트폰 붙잡고 있네요. 한 소리 하려다 꾹 참았더니, 자기도 눈치가 보이던지 주섬주섬 가방 챙겨서 나가더라고요. 저도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조심하긴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
“아드님께 상처 주지 않으려고 많이 참으셨네요.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정말 많이 노력하셨습니다. 민기와 대화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시네요. 그럼 최근에 아드님과 어떤 대화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강일은 지난 수개월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동안 민기와 그럴듯한 대화를 나눈 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가끔이라도 얘기를 했는데……
“요샌 통 대화가 없었네요. 음, 작년에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갈 때 애가 좀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그때 좀 오래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어떤 얘기였는지 좀 알려 주세요?” 유 코치는 아주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그 나이 때 하는 고민이었죠. 중학교 가는 거에 대해 너무 겁을 먹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겁먹을 것 없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 생각하냐? 새로운 환경에 가게 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불안한 거다. 아빠도 옛날에 그랬는데 금방 적응되더라.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뭐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아요.” 강일은 그때 일이 다시 떠 올라 반갑게 이야기하였다.
“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팀장님께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민기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반응이요? 음……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불안해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결국 제 말처럼 중학교 가서 한 달 만에 완전히 적응해서 잘 지내더라고요.”
“네, 다행이네요. 그 대화의 만족도를 100점 만점 점수로 나타낸다면 팀장님은 몇 점 주시겠어요?”
“한 90점?” 강일이 즉시 대답했다.
“그럼 민기는 몇 점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의외의 질문에 강일은 멈칫했다. ‘과연 민기에게 그 대화는 몇 점짜리였을까?’
“한 30점 될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민기 입장에서 생각하니 아빠가 자기 맘을 몰라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야단맞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니 대화라고 해도 저 혼자 떠들었던 거고. 대화가 끝난 다음에도 민기 표정이 좋진 않았어요.”
“네 민기 입장을 잘 헤아려 주셨네요. 만일 민기와 그런 일로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대화가 될 수 있을까요?”
생각에 잠겨 있는 강일에게 유 코치가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질문했다.
“그럼 다른 질문을 드릴게요. 팀장님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대화를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누가 떠오르나요?”
잠시 생각에 빠진 강일은 이 질문에 딱 맞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외할머니죠.”
“아, 외할머니요.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할머니는 보통 시골 할머니였는데 제겐 참 좋은 분이셨죠.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편해지는 그런 분 있잖아요?”
강일은 할머니를 떠올리자 그리움, 아쉬움, 포근함, 슬픔 등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특별히 할머니와 관련되어 어떤 일이 떠오르나요?”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다투셔서 몇 달 동안 외갓집에서 산 적이 있었어요. 이사하고 전학해서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전학한 지 며칠 안돼서 그날도 학교에서 말 한마디 안 하고 앉아 있다가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맞아 주셨어요. ‘아이고, 내 강아지 어서 온나. 욕봤재?’ 그냥 그렇게 반갑게 맞아 주시는 할머니를 보니 갑자기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 안고 엉엉 울었어요.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괘안타. 애고, 째깐한 것이 얼마나 속이 부대꼈나. 괘안타.’ 그때 할머니 품 안이 참 편했어요. 할머니 냄새도 좋았고. 웬일인지 그다음부터는 반 아이들과 말도 하게 되고, 친구도 사귀게 되었어요. 학교 갔다 오면 할머니한테 친구들 얘기도 하고, 나름 재밌게 지냈던 것 같네요.”
강일은 할머니 품 안의 그 냄새를 다시 맡는 듯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참 좋은 할머니셨네요.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 편안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땠는지요?
유 코치가 물었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할머니께서 별로 말씀을 많이 하진 않으셨어요. 주로 제가 많이 떠들었죠. 할머니는 그저 저를 바라보시고 ‘그렇지, 아이고, 우짜꼬’ 하고 감탄사만 하셨죠. 그래도 이상하게 할머니랑 얘기하고 나면 뭔가 속이 시원해지고, 힘이 났던 것 같네요. 그때가 환경적으로 참 불안하고 힘든 시기였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할머니 덕분에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거죠. ”
“아, 할머니는 타고난 코치셨군요.”
“네? 할머니가 코치였다고요?” 강일이 되물었다.
“그렇죠. 할머니는 팀장님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하셨네요. 적극적인 경청도 하셨고요. 코치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경청인데, 할머니께서는 따로 배우지 않으셨어도 코치 같은 태도로 행동하신 거죠.”
“경청이라면 그냥 잘 들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일반적으로 잘 듣는 정도인 경청을 넘어 코치는 적극적 경청을 한답니다. 조금 설명드려도 될까요?”
“네, 해 주세요.”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라는 건 수동적인 행위죠. 그런데 경청을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감정, 의도, 욕구까지 파악하고, 내가 그것을 알아들었다고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랍니다.”
강일은 유 코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한눈을 파는 일이 없이 항상 눈을 맞춰 주셨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할머니는 야단치는 일 없이 다 받아 주셨다. 할머니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면 이 세상에 단 둘만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할머니는 그의 휴식처고, 안전지대고, 에너지 공급소였다.
“그럼 좋지 않은 듣는 태도는 무엇일까요?” 유 코치가 물었다.
“음, 말을 끊는 거겠죠?”
“그렇죠. 말을 끊는 것이 대표적으로 나쁜 태도죠. 다른 여러 가지도 있답니다. 우리가 잘하는 판단, 비난, 조언, 충고, 탐문, 해석, 가르치기, 해답 제시 등도 좋은 태도가 아니랍니다.”
“판단, 비난은 그렇다 쳐도 조언이나 충고는 좋은 게 아닌가요?”강일이 되물었다.
“네, 조언이나 충고가 나쁘다는 말씀은 아니고요,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대화 태도는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방법도 아니랍니다.”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전에 한 선배에게 기껏 어렵게 고민을 얘기했는데, 한참 동안 자기 얘기만 하고 이래라저래라 조언해 주더라고요. 답답했어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그럼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거죠?”
“네, 적극적 경청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말로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어린 팀장님께 해 주셨을 따뜻한 눈 맞춤, 맞장구에 더해서 그 말을 요약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 감정, 욕구 등을 말로 표현해 주는 거죠.”
“그거 말은 쉽지만 하기는 어렵겠네요.”
“네, 쉽지 않죠.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일 누가 진심으로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비판하지 않고 열심히 들어준다면 어떠실 것 같아요?”
“그거야 좋겠죠. 그러고 보니 코치님이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반응하시는 것이 바로 적극적 경청이네요.”
“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코칭 세션을 시작하며 아드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죠.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과 비추어 어떤 성찰이 있으신가요?”
“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겠네요. 제가 그래서 할머니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제게 어떤 조언이나 충고를 해 주지 않으셨어도 제가 잘해 낼 것을 믿어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힘을 얻을 수 있었죠. 전 지금까지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우리 애가 좋아질까만 고민했고, 들으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 핵심을 짚어내셨네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말과 몸과 마음으로 경청해 주면 마음이 열린답니다. 그럼 팀장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시도를 해 보시겠습니까?”
“일단 누구의 말이라도 경청을 해 봐야겠네요. 중간에 끊지 않고. 하지만 과연 이렇게 듣고만 있는 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강일이 되물었다.
“네, 그렇죠. 듣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죠. 문제 해결은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우선 상대방에게 경청을 잘해주신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상대방이 좋아할 것 같네요. 마음도 편해지고. 그럼 관계도 좀 좋아지겠죠?”
“그럼요. 관계 개선을 위한 좋은 출발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읽을거리와 과제를 메일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지금 기분은 어떠세요?”
“그동안 할머니를 잊고 지냈었는데, 오늘 다시 떠올리니 참 새롭습니다. 할머니가 제게 해 주신 것처럼 저도 아들에게 해 주면 좋겠어요. 아이에게 화가 날 때 할머니를 떠올리면 괜찮겠는데요?”
“좋은 생각이네요. 할머니도 팀장님의 노력을 기뻐하실 것 같아요. 저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