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으로 다가가기
회의실 창 밖으로 노랗게 맺어진 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러질 듯 얇은 가지에 어찌 저렇게 많은 감들이 달려 있을까? 참 힘들겠다는 생각에 멍하니 있을 때 유 코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팀장님, 안녕하세요? 지난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아, 코치님. 반갑습니다. 지난주엔 많은 일들이 있었죠.”
“아 그래요? 그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눠 주시겠어요?”
“주말에 아들과 풍물시장에 나들이 다녀왔습니다. 서울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 있는데 옛날 추억을 자극하는 시장 풍경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언제 한 번 가야 지하고 벼르고 있다가 지난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별 큰 기대하지 않고 민기에게 ‘아빠랑 같이 풍물 시장에 갈래?’라고 했더니 살짝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가면 신기한 물건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다고 하고 꼬셔서 같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 즐거움의 여운에 강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민기와 함께 나들이를 가서 많이 즐거우셨나 보네요.”
“네, 아들이랑 단 둘이 어디 간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종종 가족이 함께 나가긴 했지만 민기랑 단 둘이서 간 기억은 별로 없네요.”
“단 둘의 나들이가 어떻게 좋았나요?”
“저희 집에서 시장까지 광역 버스 타고 한 시간 정도 가야 되거든요. 토요일 아침이라 버스에 사람도 많이 없어서 둘이 같이 앉아서 얘기를 많이 했어요. 솔직히 요새 민기가 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오히려 그런 저의 생각이 우리 사이를 더 멀게 했나 싶었어요. 덩치는 커졌지만 귀여운 구석도 아직 많이 남아있고, 또 한편으로는 제가 몰랐던 어른스러운 면도 알게 됐어요.”
“아, 버스 안에서 나눈 대화가 참 의미 있었나 봐요. 오랜만의 대화인데 어떻게 그렇게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는지요?”
“아무래도 집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환경을 접한 것이 다른 점이었죠. 오랜만에 밖에 나가니 뭐랄까 관계가 리셋되는 것 같았어요.”
“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셨군요. 그밖에도 팀장님께서 이 대화에 기여하신 부분이 분명히 있으실 텐데요.”
“ 그러니까 집을 나서면서 몇 가지 각오를 했어요. 그동안 코칭에서 배운 것을 활용하자고. 일단은 코치님처럼 잘 경청하고, 열린 질문도 하고, 말을 할 때는 비난이나 방어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또 골칫덩이 속 썩이는 민기가 아니라 정말 귀하고 사랑스러운 민기로 바라보기로 한 것도 효과가 있었어요. 사실 버스를 타자마자 민기가 스마트폰 꺼내서 게임을 시작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져서 뭐라 할까 하다가 잠깐 스톱했죠. 내가 만약 ‘야, 넌 오래간만에 아빠랑 같이 나들이 가는데 또 게임만 하냐?’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한 거예요. 아마도 민기가 핸드폰은 집어넣더라도 기분 나빠하면서 창 밖만 보고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겠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러다가 민기가 하고 있는 핸드폰 게임에 대해 물어봤죠. 무슨 게임이냐, 어떻게 하는 거냐 하다가 저도 해보니까 나름 재밌더라고요. 제가 게임을 예상외로 잘하니까 민기도 신기해하길래 왕년에 아빠가 오락실에서 파리 꽤나 잡아 본 실력이라고 자랑했죠. 그러면서 얘기가 통하고 어떤 벽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오, 민기의 관심사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시니 벽이 없어지고 이야기가 통하는 일이 생겼네요.”
“그러게요. 풍물시장 가서는 같이 옛날 물건 구경도 하고, 노점에서 칼국수도 사 먹으며 재밌었어요. 저는 오래된 물건을 보며 옛 정취를 느꼈는데, 민기에게는 그 물건들이 굉장히 신기하고 새로운 것 같았어요. 턴테이블에서 돌아가는 레코드판, 필름식 카메라, 수동식 타자기도 처음 봤다고 하고, 동전 넣는 공중전화도 굉장히 신기해하더라고요.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민기에게는 낯설고, 새롭고 신기한 것일 수 있겠구나를 알게 됐어요. 시장 구석에서 중고 기타가 나와있는데 민기가 그걸 유심히 보더라고요.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아 사 줬어요. 별로 비싸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좋아하네요.” 강일은 민기의 기뻐하는 얼굴을 떠 올리며 얼굴이 환해졌다.
“참 즐거우셨네요. 그 가운데 팀장님이 정말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팀장님께는 당연한 것이 민기에게는 낯선 것일 수 있다는 것.”
“네, 정말 그래요. 제가 어렸을 때 음악은 당연히 카세트테이프나 레코드판으로 듣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그런 것을 구경할 수도 없잖아요. 민기 세대 아이들에게 음악은 MP3나 스트리밍으로 듣는 거죠. 세상을 경험하는 방법의 차이가 크더라고요.”
“네, 그렇다면 혹시 민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지금 말씀하신 차이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아, 정말 영향이 큰 것 같네요. 예를 들어 공부도 그렇죠. 우리 때는 못 살았으니까 먹고살려면 공부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도 그랬고, 우리도 공부에 목숨 걸고, 학교 가고, 취업하고 이렇게 살았죠. 그게 너무나 당연했죠. 제 삶이 그랬거든요. 늘 공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데 지금은 시대가 너무 좋아졌잖아요. 배고픈 일도 없고, 다들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고 많이 바뀌었죠.”
잠시 말을 잊고 침묵했던 강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코치님, 사실은 제가 자격증을 여덟 개 가지고 있어요. 남들은 돈도 안 되는 걸 뭘 그렇게 계속 공부하냐고 해도, 제게는 그 자격증이 일종의 보험이었어요. 지금 보니 제가 자격증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도 그 영향이 있었나 봐요.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해서, 자격증이라도 따 놔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끝이 없더라고요. 그 자격증으로 뭘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우리 애들 세대는 우리 때와 많이 다르죠. 공부만으로 출세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공부 외에 다른 길도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제 불안이 민기를 몰아붙이고 힘들게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자기 인생인데.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저는 제 생각과 방식을 민기한테 강요해서 계속 불협화음이 있던 거예요. 민기로서는 제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당연했겠네요.”
“강요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모든 것이 민기가 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지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민기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요. 여태까지는 민기의 행동이 다 못마땅하게 보였는데, 그건 제 기준에 의한 것이었어요. 민기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는데. 사실 시장 구경을 다 마치고 같이 저녁 먹을 때 민기가 제게 몇 년 전 이야기를 하나 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기말고사에서 수학을 96점 받아서 제 딴에는 잔뜩 기대를 하고 제게 자랑했는데, 제가 그때 ‘그거 시험이 너무 쉬웠던 거 아냐?’라고 했더랍니다. 그 순간 민기는 속으로 ‘다시는 아빠와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대요. 저는 그 일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남자 녀석이 뭐 그런 사소한 걸로 삐지나 했지만 좀 미안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민기에게는 큰 상처가 됐었나 봐요.”
“민기의 마음을 많이 헤아리고 계시네요. 만약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가 그 상황을 다시 맞는다면 민기에게 뭐라고 해 주시겠어요?”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한 강일이 대답했다.
“와, 우리 민기 정말 대단한데? 수고 많이 했네. 아빠도 너무 기쁘다.라고 해 주고 싶네요.”
“그 말을 들은 민기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기분이 좋겠죠. 아빠가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앞으로 더 잘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네, 그럴 것 같네요. 과거에 있었던 일이야 우리가 어쩔 수 없지만,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잖아요. 앞으로 민기에게 새롭게 접근한다면 어떻게 해 보시겠어요?”
“제 기준으로 제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야겠어요. 칭찬도 많이 해야겠고요. 근데 칭찬하려고 맘먹어도 칭찬할 거리를 잘 못 찾겠더라고요.”
“우선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으로 바꿔 볼까요? 민기가 보기에 팀장님께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면 아빠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구나 하고 알 수 있을까요?”
“음, 잔소리를 안 하면, 아 이것도 안 하는 거네요. 그러면 민기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주면 어떨까요? 그렇죠. 게임하면 게임에, 기타 치면 기타 연주에, 공부하면 공부하는 것에 관심을 보여주면 되겠네요.”
“하하, 멋진 방법이군요. 쉽지 않을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실 수 있겠어요?”
“어차피 자기 인생인데 뭐 어떻습니까? 한번 해 보는 거죠.”
“쿨 하시네요. 그렇게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칭찬하고 싶지만 칭찬거리를 찾기 힘들다고 말씀하셨죠. 맞습니다. 칭찬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고, 주의할 것도 있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자료를 보내 드려도 될까요?”
“좋죠. 부탁합니다. 세션 후에 보내 주시는 자료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오늘 세션을 정리하고 싶은데요. 오늘 대화에서 어떤 유익을 얻으셨나요?”
“민기와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제게 너무나 당연해서 민기에게 요구하는 것이 민기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이고,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민기와의 관계에서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도 느꼈어요.”
“그러시군요. 타인으로 향한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때 관계의 개선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팀장님의 그러한 인식이 팀장님이 원하는 더 좋은 아버지, 다가가고 싶은 아버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까 민기에게 칭찬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니 다음 주에 뵐 때까지 민기 칭찬을 가능한 많이 찾아서 민기에게 읽어 주기를 해 보면 어떨까요? ”
“좋겠네요. 한 번 해 보죠.”
“몇 개 해보시겠어요?”
“글쎄요. 10개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번 100개 찾아보시죠.”
“100개요? 그건 너무 무리일 것 같은데요.”
“누군가 팀장님께 100개의 칭찬을 해 준다면 어떠실 것 같아요?”
“이야, 100가지 칭찬을 받는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죠? 제가 도와드릴 테니 몇 개까지 해 보시겠어요?”
“그럼 한 50개 해 보죠.”
“좋습니다. 제가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100개 이상 보내 드릴게요. 그 형용사들 중에서 민기에게 조금이라도 해당하는 점이 있으면 체크를 하셔서 그렇게 생각하신 근거를 써 주시면 그게 바로 좋은 칭찬이 됩니다. 어때요, 쉽죠?”
“하하 그렇게 한다면 50개도 가능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럼요, 가능하고 말고요. 그럼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코치님 또 뵐게요.”
통화가 끝나고 고개를 든 강일의 눈에 다시 감나무가 들어왔다. 앙상하지만 잔뜩 열린 열매들을 감당하고 있는 그 가지들이 왠지 대견하고 고맙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