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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nseo May 13. 2024

우리는 왜, 그 시절에 미쳐있었는가?

마셜 맥루언으로 유식하게 알아보는 '그' 이유.

‘오늘부터 2학년 B반 금잔디는 이 구준표의 여자친구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바이다’

세탁소집을 운영하는 서민집안 딸, 금잔디. 그리고 부자들만 다니는 신화고에서 가장 잘나가는 f4 짱, 구준표. 둘은 현실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로맨스를 그려낸다. 서민이라고 따돌림을 주도하던 일진이 피해학생한테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전개와 더불어 금잔디의 폭풍같은 신분상승은 판타지의 극한을 보여준다. 스토리 전개 뿐 아니라 드라마 연출은 릴스와 숏츠의 단골 소재로 선택될만큼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유머스럽다.


드라마 <궁>도 꽃보다 남자만큼이나 황당한 주인공들의 서사와 스토리 설정을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이 아닌, 대한민국 왕실이 드라마의 배경이라는 점부터 현실성이 제로다. 게다가 서민(여자주인공)-귀족(남자주인공) 구도를 통한 그 시절 ‘국룰’ 사랑이야기는 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소 유치하고 말도 안되는 설정들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미쳐있던 시절. WHY?

어른들도 미쳐있던 그 시절, 아이들도 미쳐있었다. 이때 당시 투니버스 붐을 일으켰던 <캐릭캐릭체인지>와 <슈가슈가룬>과 같은 순정만화들이 여자아이, 남자아이 불문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등장인물들의 각양각색의 화려한 변신은 눈을 즐겁게 했으며, 에피소드가 진행될 수록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과정은 당시 아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꽃보다 남자, 궁 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했다.

드라마와 만화는 애초부터 허구적인 요소를 담는 컨텐츠에 속한다. 그러나 유독 당시의 우리는 이상할만큼 허구적인 컨텐츠에 매료당했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에 전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고,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할 일들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지금의 미디어 컨텐츠들은 허구를 다룬다 하더라도 어느정도 현실과 타협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 시절은 지금보다 더 뜨겁게 열광하던 시기였다. 관련 ost만 들어도 아직까지도 두근두근 거리니 말이다. 


우리는 왜그렇게 미쳐있었을까?




텔레비전 이전, 시각의 시대



이유를 알기 위해 시간을 뒤로 되감기 해보자. 바로 텔레비전과 같은 디지털 매체에 우리가 적응하기 전으로.

우리에게 텔레비전 문화가 일상이 된 건 21세기부터다. 그 이전, 20세기 후반에는 텔레비전이 존재하긴 했으나, 잘 사는 집 위주로 하나씩 구비되어 있거나, 문화를 누릴 여유가 있을 때나 찾는 제품이었다. 여전히 신문, 책, 잡지 등 인쇄 매체가 텔레비전을 대신한 사람들의 소식통이자, 지식의 근원이었다. 즉, 인쇄물이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시켰고, 사람들은 인쇄물이 비추는 세상이 곧 자신의 세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의 매체감각론을 적용해볼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은 매체를 통해 더욱 확장된다는 매체감각론. 인간은 1차적으로 육체로 세상을 경험한다.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귀로 세상을 듣고, 피부로 감촉을 느낌으로써 세상을 접한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의 감각들을 고도화시키며 그간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ST형 사람들은 참 살기 좋을 시대.


20세기 후반까지 신문과 책과 같은 인쇄매체들은 인간의 눈을 확장시켰다. 인쇄물을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던 세상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시각이 글자를 통해 고도화된 것이다.

인쇄매체로 지배된 세상은 시각에 특화된 문화들과 사고방식들을 생산해냈다. 인간의 눈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글을 읽을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배열된 글을 읽는 것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시각적인 규칙성에도 예민하다.

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구조도 선형적이고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형성하였다. 현실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문화적 감수성이 인쇄매체의 시대를 지배했다.









시각에서 시청각으로.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시각 편향성에서 벗어난다. 바로 21세기, 텔레비전의 대중화가 일어나면서 부터다. 텔레비전하면 뉴스, 교육 채널이 먼저 떠오를까, 아니면 드라마, 영화, 음악프로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떠오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후자를 더 많이 떠올릴 것이다. 인쇄매체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던 청각적인 요소들이 텔레비전에서는 구현이 되면서, 훨씬 감성적인 컨텐츠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맥루언은 청각을 심미적이고, 감성적으로 바라본다. 또한 기존의 문화적 감수성을 새로운 매체의 문화적 감수성이 대체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등장이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였고 시각의 편향성이 희석된 것이다. 그리고 기계적이고 논리적이었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흔들었다. 보편화된 팩트와 다르더라도,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감성이더라도 대중들은 이제 납득이 가능해졌다. 아니, 납득을 넘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맛보며, 비논리적인 세계에 흡수되었다.



그 시절 텔레비전이라는 기억의 한 조각.


만약 우리가 여전히 글에 몰입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수많은 대중가요들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었을까. 노래에서 음을 제거한다면, 전혀 논리와 맞지 않은 가사들 때문에 이상하게만 생각했을 것이다. ‘놀면뭐하니’에서 이효리가 블랙핑크의 ‘팡팡파라파라팡팡팡’이라는 가사를 읊은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는 음과 리듬이 있기에 가사가 말이 안되더라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을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21세기에 살고 있던 우리의 공감각을 이용해 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했다. 대신 우리가 이전에 경험해볼 수 없었던 판타지와 같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들은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고, ‘대한민국 황실’에서 사랑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만의 수호천사를 꿈꾸며 자신의 꿈을 이룰 희망도 가져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안되는 기억들이다. 텔레비전 하나로 특별한 세계에 푹 빠져본 이 기억들. 이해는 안되지만 싫지는 않다. 가끔은 추억의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기도 한다. 모두가 미쳐있던 그 시절은 웃픈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았고, 지금의 전자기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절만의 텔레비전 감성이 한편으론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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