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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생각보다 특별합니다.

두산인문극장 2025 : 지역 LOCAL

by yannseo



저에게는 학교 시험에서도, 수능 시험에서도, 다른 여러 시험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 난제인 문항이 존재합니다. '난 누구일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풀어보고 있지만, 풀면 풀수록 더 복잡해지고, 모든 풀이가 백지화되고, 아마도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절대 풀지 못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죠. 그나마 내게 맞는 듯한 학교, 직장, 때때로의 모임들에 속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일 수도 있겠다.'라는 두리뭉실한 가정과 함께 알고 싶은 자신의 모습에 한 없이 가까워지려 합니다. 정답은커녕, 풀이조차 확실히 할 수가 없으니 나의 정체성 찾기의 결과는 불확실함으로 맺어지지만, 그럼에도 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선택한 또 하나의 정체성 찾기 프로젝트, 두산아트센터 에디터 활동. 어김없이 무모한 질문을 던지며 두산아트센터 에디터를 위한 첫 발걸음을 떼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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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첫 강연은 <에피> 편집위원이자 과학기자인 윤신영 님의 ' 1만 년의 고독: 인류의 이동과 지역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역과 인류의 이동? 그것도 1만 년 전?' 강연의 주제를 보고 든 생각이었죠. 처음에는 피부로 와닿지 않는 주제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100년 전, 아니 20년 전 사회의 모습도 제 일처럼 느껴지기 어려운데, 1만 년 전이라니. 분명 우리에게는 먼 친척이나 다름없는 인류의 모습이지만, 6촌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하기 어려운 저로서는 그다지 실감 나지 않은 주제였습니다.


기대감과 약간의 떨떠름함. 이 오묘한 감정을 가지고 윤신영 기자님을 한껏 반가워하며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1만 년 전, 어쩌면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요해질 것이다.' 기자님의 시작말은 마치 저를 향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진행된 강연을 들어보니 처음에 가지고 있던 우려는 기우에 그쳤습니다.




(사진) 두산인문극장 2025_강연_1강_1만 년의 고독 (5).jpg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사회, 지역, 게다가 인간의 마음까지. 5만 년 전의 벽화


윤신영 기자님이 전해주는 인류의 역사는 단순한 정보 전달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벽화'라는 특정 소재를 통해 더욱 아트적이고, 인문학적이고,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한 편의 서사를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벽화의 서사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돌에서 시작합니다. 고고학자가 발견한 이 돌은 우연히 발견된 돌이 아니라, 300만 년 전 누군가가 소중히 가지고 있던 돌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발견된 지점에서 만들어질 돌이 아닌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산지에서 만들어졌을 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산지에서 가지고 나온 돌이 발견이 된 지점 주변까지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돌은 특별한 점이 있는데요, 바로 사람 모양의 돌입니다. 돌을 발견한 그 누군가는 마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이 돌에 특별함을 느꼈고 소중이 여겼다는 것이죠. 300만 년 전에서도 인류에게 예술 감각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세상은 인류의 예술성을 계속해서 파헤치기 시작했고, 잇따라 과거 예술의 흔적들을 발견해 나갑니다.


무늬가 그려진 돌조각이 스페인에서 발견된 2018년. 이를 기점으로 남유럽 곳곳에서 벽화가 나타남으로써 '고등예술'의 시초에 대한 논의는 유럽을 중심으로 흘러갔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예술의 본고장이라는 생각이 공공연하게 퍼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인도네시아 부근에서 더 오래된, 심지어 유럽 벽화들보다 더 심화적인 스킬이 들어간 벽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예술고고학계의 기존관념들은 타파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남긴 벽화 속에는 사냥과 채집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상황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합니다. 자연물에 대한 비대한 표현, 인간들이 사냥감을 둘러싸고 견제하는 분위기. 당시 자연이란 그림으로 남길 정도로 특별하기도 하면서도 어쩌면 인간을 초월할 만큼 위협적인 대상인 듯 다가옵니다. 더 나아가 두려움과 경외감, 예측 불허에 대한 불안함까지 와닿습니다.

20210113503862.jpg 한겨레 기사이미지
AKR20210114054900009_02_i_P4.jpg 연합뉴스 기사이미지


벽화 이야기가 주는 시사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아주 오래전 우리가 밟고 있는 땅에서 향유하던 예술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2) 햇 수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동물은 전 지구적으로 확산해 있었으며, 하나의 종류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은 제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4만 년 이상 살았던 구석기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증명할 수는 없지만요.' 벽화 하나로도 그들의 정서를 유추해 볼 수 있던 기자님과 그리고 저의 모습을 보니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해지더군요. 예술의 기조가 인도네시아 벽화로 크게 뒤틀린 것처럼, 알게 모르게 기존의 틀에 갇혀 그들을 나와 별개인 종족으로 바라본 그동안의 시간이 뒤틀리는 듯했습니다.



우리 인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고독의 존재다.



'1만 8000년 정도 전, 2만 년 전 한강은 황해의 초원을 달렸다. ' 윤신영 기자님은 고독이라는 키워드를 꺼내 들며, 1만 년 전, 한강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의 황해가 당시에는 초원이었고, 그 초원을 한강과 압록강의 줄기가 합쳐져 크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한반도는 오히려 인류가 살지 않았고, 황해 초원에 입지를 확보하고 일상을 살아갔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현재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다른 과거의 삶과 지역의 범위, 이는 어쩌다가 완전히 변화하였을까요?


'빙하기'는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뉴욕이 다 덮힐정도로 두꺼운 빙하가 온 지구를 감쌌으니, 당시 사람들은 겨우 삶을 연명해 가죠. 빙하기가 한반도와 황해 초원의 입지를 뒤집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 계속해서 이어오던 삶에 위협을 받은 인류들에게 빙하기는 희망도 없는 고문이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어두운 곳에다가 그림을 그렸을까요?' 기자님의 질문 속에 당시 사람들의 심정이 모두 함축됩니다. 대부분의 벽화들이 동굴 속에서 발견됐으니, 이들은 아마 초인적인 자연의 힘에 무력함을 느낄뿐더러 앞서 말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벽화를 다시 되새겨보면 인간의 고독함이 머리를 감쌉니다.


외부적인 힘에 의한 고독함도 있지만, 우리 인류는 스스로를 고독한 존재로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역사가 확실히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공식적으로 발표가 난 것은 없지만, 이동하고 정착하면서 타 세력들을 몰아내고, 자원을 위해 수많은 종족들을 멸종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생존에 생존을 위해서, 불안하고 알 수 없는 힘들을 자신들만의 또 다른 힘으로 제압한 움직임들이 지금의 인류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멈추지 않고 인류는 외롭고 고독한 상태에서 공간적인 확산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지금도 물론이고요. 그리고 그 확산은 지금의 지역을 만들었고, 현재도 우리는 또 다른 지역을 확산해 갑니다.



왜 고독을 이야기할까?

다시 강연을 듣기 전으로 돌아가 그때의 생각을 이야기해보자면, 제목에 왜 고독을 붙였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인류의 이동을 이야기할 때면, 공간의 이동, 지리적 좌표, 발견된 유물 같이 객관적인 지표들 위주인 이야기들로 공부를 해왔었는데, 제목부터 서정적인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그러나 기자님의 담백한 스토리텔링은 '고독'이라는 감정을 납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자, 피까지 섞인 존재들이었으니까요. 완벽한 시대상은 모르더라도 생각과 감정, 정서는 같은 인간으로서 연결될 게 전혀 이상하지 않더군요. 여전히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을 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위상이 바뀌어버렸고, 심지어는 지구라는 지역을 떠나 우주까지 개척해 나갈 미래를 그리고 있는 차원에서 과거와 지금의 인류 모습은 너무도 다릅니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공간, 불확실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이동하고 개척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의지는 똑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경계 짓고 때로는 정복하면서 고독해지는 것까지도 말이죠.


(사진) 두산인문극장 2025_강연_1강_1만 년의 고독 (4).jpg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다행성 종족으로의 인류, 증강인류, 기후변화와 인류,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윤신영 기자님은 앞으로 행진하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을 시사합니다.


몇십, 몇 백 년 만을 넘어서 인류는 전 세계적으로 단일종으로서 퍼져나갔고, 지역이라는 개념을 발명했고, 이제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으로까지 종족을 확산하려 합니다. 게다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맞먹는 존재로 AI를 탄생시키려 하죠. 아주 무서운 속도로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나아가려는 인류는 아마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나의 시대를 개척해나 갈 겁니다. 지금이 그 한 획을 긋고 있는 중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구를 벗어나고자 하는 건, 나아가려는 의지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불어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지구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과 정착을 계획하고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도 기계가 우리보다 일을 잘한다고 인정하면서 인간의 무력함을 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단물을 다 뺄 정도로 그들을 이용한 역사가 너무 길어 이제는 기후도 감당을 못할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은 또 고독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고독함이 아니라 완전히 혼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속성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외톨이로 몰아가고 있는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과연 다른 행성에 간다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더 나쁜 일들은 생기지 않을까요? 데이터에 지고 있는 건 우리가 만들어낸 좌절감이 아닐까요?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데이터 조합물에 굴복시키는 것, 몇 천만년의 역사로 단일종을 기록한 위대함을 저버리는 것, 우리를 온 힘을 다해 살아갈 수 있도록 전폭 지원을 해주는 이 지구를 마다하는 것, 작게 보면 계속해서 파편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까지도. 모두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불완전한 우리, 그래서 더욱 불안한 우리. 생김새, 삶의 방식 많은 부분들이 현재의 우리와 많이 다르지만 꾸준히 불완전함에서 불안해하고 희망과 절망을 끝도 없이 겪는 모습은 역사적으로 일관됩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지구가 이야기해주고 있거든요. 동식물이 동서양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고, 별개의 종들이 파생되어 있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혈통으로만 이어져있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들인 것이죠. 벽화가 증명해주고 있고, 그걸 보는 우리의 감정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연을 통해서 저는 아주 오래된 혈통에게 위로를 받는 듯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 아직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어떤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지도,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딱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네요. 생각보다 내가 특별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으면서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들었던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독이 아닌 희망적인 미생의 나날들을 걸어보길 바라며 첫 do 에디터의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 본 콘텐츠는 두산아트센터 에디터 활동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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