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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주인공은 그렇게 관찰자가 되었다.

함부르크 세계에서 살아남기

by yannseo

고등학교 시절, 문학을 공부할 때면 무조건 직면하는 문제가 있다. ' 다음 중 이 글의 시점으로 알맞은 것을 고르시오.'.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서술한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을, 화자를 언급한다면 1인칭 주인공 혹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 특히 수필이나 시, 에세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가정 하에 문제를 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공식이 내게는 당연했다. 애초에 경험담에서 본인의 감정을 배제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공장식 문제풀이는 자연스레 인생의 모토까지 정해줬다.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모토를.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건 나름 괜찮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달까,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갓 대학에 들어가고, 보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니 자유로움이란 이런 거구나 하며 제대로 된 해방감을 알게 됐다. 수많은 자유는 곧 선택지와 가능성들이었고, 의지만 있다면 바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이상들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불어난 낭만들은 나를 자꾸만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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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 또 다른 솜사탕이 내 손에 쥐어졌다. 독일어 전공생으로서 한 번쯤은 독일에서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교환학생이라는 타이틀을 한 번쯤 가져보고 싶었다. 초급에 가까운 독일어 실력,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러한 현실은 당시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교환학생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무작정 신청서를 들이밀었고, 마침내 나의 낭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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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간이 넘는 여행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심도 있게 고른 플레이리스트로 온갖 유럽 라이프에 대한 환상에 젖어들었고, 혼자서 디즈니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들어냈으니 설렘만 가득했다. 엉덩이 뼈가 저릿저릿하다는 점만 빼고는. 함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낭만은 한 스푼 더해졌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라 날씨도 가장 좋았고, 기숙사도 기대 이상으로 쾌적했고, 동네도 한껏 독일스러움을 풍겼다. 나의 환상을 채워줄 무대로서 제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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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낭만은 그저 판타지에 불과했던 걸까. '저는 독일에서 살아요.'를 입증하기 위해 찾은 주민센터에서 처음으로 외국어의 벽을 느꼈다. 말이 안 통하니 굳은 표정으로 문서를 작성하는 직원에게 그저 할 수 있었던 말은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뿐이었고, 열심히 독일어를 해보려 하면 못 알아듣겠다는 제스처만 돌아왔다. 이후에도 독일인을 직면하는 순간이면 꽤나 차가운 반응을 마주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들도 외계어처럼 들렸을 나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들어주려다 보니 그런 반응이 나왔으리라 본다.) 단순히 회화의 차원으로 봤을 땐, 왜 그리 자신이 없을까 싶을 테지만, 당시 내게 닥친 감정들은 언어적인 장벽뿐만이 아니었다. ' 아무것도 못하면서 뭣하러 여기에 온 거야.'. 허탈감과 회의감, 외로움과 두려움은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하였고, 본인에게 한계만 긋도록 했다. 독일인이 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과 불친절함이라는 인식을 그들에게 퍼부으며 나를 방어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의 솜사탕에 물이 닿아버렸다. 나의 교환학생, 나의 첫 해외살이, 나만의 특별한 경험기에서 '나'는 사라져 갔다. 초반부터 혼자만의 동굴에 자꾸 몸을 감추기 바빴다. 계속 내가 회피하고 있는 동안 같이 갔던 다른 친구들은 자리를 어느 정도 잡아가는 듯 보였다. 그렇게 나의 교환 이야기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등장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상은 마트 장보기, DM에서 화장품 사기, 커피 주문하기, 키오스크 방문하기, 어학당에서 수업 듣기 등으로 흘러갔다. 교환에서 다들 한다던 외국인 친구 사귀기, 식당 주인과 프리토킹하기, 클럽이나 기숙사 파티 가기는 내 일과에 거의 없었다. 독일인과 만나고, 소통하고, 교류를 하는 건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은 '그들'과는 다른 세상, 한국과는 다를 게 없는 그런 세상에 존재했다.


솜사탕은 분명 사라져 갔다. 무섭게 부풀려갔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지만 사라져 가는 것도 참 깔끔하질 않았다. 찝찝하고도 끈적거리는 질감이 자꾸 나를 방해했다. 상당히 미련해 보이는 끈적함이었다. '그들'의 세상에 꽤나 미련함이 있던 건지,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들을 흉내 내보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세상을 완전히 지키고 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의 경계에 간신히 어정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이런 상태를 이방인이라 칭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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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면서 학생들이 팀플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산책하면서 동네 주민들을 마주치거나, 버스나 우반을 타며 주인과 함께 동승하는 강아지들을 보며 그나마 독일에 있음을 실감했다. 플리마켓을 가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방문하고, 시즌제로 운영하는 돔(작은 이동식 놀이공원)을 즐기면서 가벼운 독일의 문화를 즐기기도 했다. 이방인은 여전히 흡수될 순 없었다. 왠지 모르게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을 드라마틱하게 떨쳐내기엔 버거웠다. 달갑진 않은 이방인의 신분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용기라는 걸 실천할 수 없었기에 그저 그 상황을 적응해나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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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던 걸까. 그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일상이 나쁘지만은 않게 다가온 때가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유독 자세히 보이면, 이방인의 눈에서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는 아니었지만.) 셀카나 풍경을 주로 찍던 카메라 앵글도 점차 그들의 모습을 비추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소리를 죽여서 그런 것일까. 그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지, 어떤 인사를 나에게 건네는지, 강아지들에게 무슨 훈육을 하는지, 크고 작은 그 세계의 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관찰자로서의 독일 생활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외롭고 고독하고 심하게는 괴롭기까지 했으면서도 나의 위치를 인정할 때면 그들의 세계는 눈과 코와 입과 귀를 통해 온전히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비워졌고, 몸은 그들의 세계에 젖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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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온 입장에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는 자랑거리를 입 밖으로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독일어를 향상한 것도 아니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알차게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었다. 독일어 시험도 응시해 보거나 스몰토킹을 위해 전화도 시도해 보고, 이런저런 시설 같은 곳도 방문해 봤지만, 성과는 처절했으니 점점 도전은 무슨,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온 경우가 다반사였다.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피하기만 했을까, 좀 더 부딪혀볼 걸'이라는 후회가 밀려들어오고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분명 똑같았을 것 같다. 준비가 덜 됐고, 첫 해외 살이에, 제대로 된 현실을 맛보지 못했던 온실 속 화초는 또다시 꺾이기 마련이기에.




그럼에도 2년이 지난 지금, 이제라도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이방인이었던 그 화초가 밉게만 보이진 않아서다. 분명 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면서 그쪽 세계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도 관찰자만의 시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울 그런 세계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가장 눈에 띄었던 그들의 세계는 자연을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세계라는 점이다. 이미 공공연하게 독일이 친환경국가라는 사실은 널리 퍼져있지만,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알려진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독일어 전공으로 몇 년 동안 독일 사회나 문화와 관련된 지식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만, 확실히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건 차원이 달랐다.



24시 편의점? 아니, 24시 휴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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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국이라 다를 수도 있지만, 함부르크는 가는 길마다 휴지통이 놓여있다. 손에 쓰레기가 생길 때 즈음, 옆을 돌아보면 기가 막히게 휴지통이 나를 반긴다. 편의시설이나 식당, 마트가 저녁이 되면 바로 문을 닫아버리지만, 유일하게 24시간 동안 열려있는 건 휴지통이었다. 편리성은 어느 정도 희생해야겠지만, 자연보호에는 한 없이 너그러운 그들의 세계. Pfand는 너무도 잘 알려진 제도지만, 가난한 학생들에게 은근 한 줄기의 빛 같은 존재다. 한 번에 많은 공병을 기계에 넣으면, 간식거리 하나 정도는 쟁일 수 있는 짤짤이들을 장만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동전이 뭐가 그리 반가울까 싶겠지만, 현금을 많이 사용하는 그들의 세계에선 짤짤이가 필히 요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항상 동전지갑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패알못 독일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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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라고 하면 옆동네 프랑스나 남유럽 국가들의 이름이 제일 많이 거론되지만, 옷을 잘 못 입는 국가라고 하면 독일은 항상 빠짐없이 등장한다. 나도 독일의 브랜드 중에서는 푸마나 아디다스, 그 외에는 자동차 브랜드 밖에 모른다. 함부르크에서 지내면서도 독일은 옷을 못 입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가끔가다가 눈길을 끄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파리나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와는 그 빈도수가 확실히 적었다. 게다가 형광조끼나 어두침침한 바람막이, 정말 패션과는 거리가 먼 우비를 착용한 사람들이 많았어서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의 우매함이었다.


함부르크의 날씨는 변덕 그 자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분명히 화창한 날씨였음에도, 준비하고 나갈 때면 천둥 번개가 치고, 태풍급의 바람이 불어서 약속을 취소하는 게 다반사였다. 밖에 나가있을 때도 5분에 한 번씩 비가 오고 무지개가 뜨고, 갑자기 우박이 뒤에서 나를 쫓아오고. 온종일 날씨가 화창한 날은 정말 행운일 정도다. (심지어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전파도 좋지 않아서 전화가 잘 안 된다. 그 이후로 나의 폰은 지금까지도 통화가 안 되는 상태다.) 그렇다 보니 외출 시에는 무조건 우비나 우산이나 바람막이가 필수다. 그곳에서는 우비가 우산보다 더 유용하기도 해서 나도 우비를 애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초반에는 유럽을 즐기겠다고 패션쇼를 했지만, 지내다 보니 다 헛수고라서 그냥 편한 복장에 우비를 입었다.


겨울은 또 해를 보는 게 귀하다.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해가 뜨고, 3-4시만 되면 해가 지고 있어서 외출시간이 급격히 줄어든다. 가로등도 많지 않아서 주변의 시야가 그리 넓지도 않고, 어두워서 그런지 겨울이 되면서 사건 사고가 많은 게 보였다. 처음에는 몰랐던 형광조끼룩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자전거나 보행 시에 급격히 어두워지면 사고에 노출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차를 들고 다니는 편도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형광조끼를 착용하고 외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교통체증이 일상이고,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일회용 우산을 구매하지만, 그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우반이나 자전거를 이용하고, 일회용 우산이 아닌 우비나 바람막이를 착용한다. 심지어는 비가 세차게 내릴 때에도 그냥 맞고 간다. (나도 점점 함부르크화 되면서 비가 쏟아질 듯 내려도 맞고 가거나 가죽재킷으로 가리고 뛰어다니곤 했었다. ) 있는 그대로의 날씨를 수긍하는 그들의 생활은 어쩔 수 없이 패알못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견권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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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댕댕이들은 하나같이 순둥이들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작은 퍼피들 종류도 아니라서 더 놀라웠다. 우람하고 우직하고 듬직한 아이들이 제법 낯선 이들을 보면 짖을 법도 한데, 일어서지도 않고 앉아서 주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귀가하면서 탄 우반에서 발견한 한 견주와 큰 개의 모습은 초반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아이가 일어나려고 하니까 쿵 소리가 날만큼 주인이 제압했고, '안돼, 엎드려'라는 말과 함께 목을 짓눌렀는데, 처음에는 학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 후에도 견주는 계속해서 아이가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지켜보았고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 의아했던 건, 그러면서도 그 개는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견주는 웃음으로 그 아이를 칭찬하는 듯 지긋이 바라보며 그들이 갈 목적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친구와 나는 한국어로 속닥속닥하며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고, 그 견주가 그걸 들었는지 한국인이냐 물어봤다. 너무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우리에게 예쁜 장미 한 송이를 선물로 주고 웃으며 그의 개와 우반을 떠났다. 견주의 승객들을 향한 매너와 그의 개를 사랑하는 마음은 잠깐동안 고스란히 느껴졌다. 달콤한 꽃을 받았다고 해서 그를 미화시킨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이 많은 공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들은 언제나 주인의 발걸음을 앞서지 않았고, 같은 속도 혹은 뒤에서 주인을 따랐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흥분하거나 날뛰려고 하면, 곧바로 목줄을 짧게 잡고 'NEIN(안돼)'라고 속삭였다. 엄중한 목소리와 훈육에 약간 놀란듯한 개들을 보며 견주들은 그들의 마음을 다시 위로하면서 산책 훈련에 나섰다.


정 없어 보이고 엄격한 그들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견권을 위해 매일을 노력하고 있었다. 견권이 지켜지고 있다는 건 견주의 눈빛뿐 아니라 개들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에서도 느껴졌다. 아무리 개가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사람의 안전이 우선이고, 주변 매너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아기로서만 바라봄이 아닌, 개를 개로서 바라봐주고 아껴주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훈련한다는 점이 정말 동물과 함께 공존하는 삶을 보는 것 같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져서 공존하는 삶. 가깝지만 멀리서 바라본 그들의 세계였기에 아마 느껴볼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들의 생활을 보고 따라 하며 조금은 그들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조금은 그립기도 한 것 같다. 바람막이를 찾는다든가, 비를 쌩으로 맞고 다닌다든가, 강아지를 아기처럼만 바라보지 않는다든가 하는 습관이 한국에서 여전히 나타나니까. 기름과 물과 같던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배워가는 건 많았나 보다. 혼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여정, 작은 일탈 아닌 일탈을 해보며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은 아마 내가 온실 속 화초였던 시절이어서 가능했던 것일 수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 어려웠고, 그렇다고 멀어지기엔 미련이 남았지만, 나름 혼자 둥 떠버린 채 돌아다닌 삶도 (지금 보니) 나쁘진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힘껏 그들의 세상에 발을 디뎌보고 싶다. 아니, 발을 디뎌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발자국도 남기고 싶다. 그동안의 관찰 일지를 한 데 모아 그들에게 한 바가지 물어보고 싶다.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맞는 것인지, 맞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마음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또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공존했던 그들에게 다음에는 그 공존의 자리에 내가 있길 바란다고 이야기하며 먼저 다가갈 수 있길. 그렇게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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