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25 : 지역 LOCAL
누군가의 불행은 나의 행복
즐거움에는 대부분 굴곡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퍼즐 한 판은 움푹 파인 조각이 볼록 튀어나온 다른 조각과 반복적으로 맞춰지며 완성되는 것처럼요. 시소는 한 사람이 세차게 발을 딛어야 상대방이 튀어 오르는 짜릿함을 맛봅니다. 또한 오락기기나 필수 전자제품을 사용할 땐 구멍이 있는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아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의 굴곡은 양쪽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되죠. 불균형을 맞춰나가야 이상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불균형에서 오는 행복.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불균형이라는 현상이 그다지 진정한 행복을 향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행복은 행복인데, 자신과는 다른 점들을 깎아내림으로써 본인을 추켜올리는 듯한 행복이랄까요. 불균형을 불평등으로, 다름을 틀림으로 만들어내면서 자신이 옳고, 이상적인 인간임이 인정되는 듯한 현상을 즐기는 것. 마치 누군가의 불행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SNS나 여러 미디어를 보면 이미 이런 현상이 만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4월 21일에 열린 두산아트센터의 강연, <지역과 우리, 나의 영토성: 이주와 정체성>에서는 이주라는 행위에서 비치는 사람들의 정체성, 그리고 꽤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역의 특성에 초점을 둔 강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신혜란 지리학과 교수는 강의를 통해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지역의 경계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신혜란 교수가 시사하는 바는 앞서 언급한 지금의 세상을 굉장히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듣는 동안 약간의 불편함도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도 같이 변화해야 하죠. 하지만 때로는 변화에서 벗어나 안주하고 싶기도 합니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상황을 벗어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루빨리 결정해야 예측불허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질 모르겠고, 뭘 좋아하고, 어떤 걸 잘하는지 알 수가 없는 데다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은 새로움을 추구하니 자꾸만 불안하고 조급해지고 세상과 멀어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다른 존재들과의 경계 짓기 (bordering)입니다. 나와는 다른 이들을 부정하고 깎아내리면서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경계 짓기. 울타리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이제는 생존방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혜란 교수의 강연이 날카롭게, 약간은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도 제가 이러한 생존방식을 본의 아니게 선택하고 있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불평등을 지역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신혜란 교수가 정의하는 지역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권력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한 공간에 두 명만 있어도 생기는 것이 권력이며, 사람들의 움직임, 자본의 움직임, 세계의 움직임은 이러한 권력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관계는 무수히 많은 경계를 파생시키고 각자가 정의한 경계는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고,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실현되기도 합니다.
신혜란 교수는 '이주'를 이야기하며 지역의 권력성을 논합니다. 과거의 이주는 개인의 결정보다는 자본의 이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근대 국가에 있어서는 통치의 수단으로 많이 활용이 되었습니다. 반복적이고 임시적인 이동에는 국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 왔죠. 사회적인 이동은 분명 국가적인 규모로 이뤄지지만, 이동의 고무와 규제는 개인을 내면화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동하는 사람은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 마스크 안 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암묵적인 룰이 오고 갔던 그 당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이동 규제는 국민들의 이동에 대한 인식을 내면화시켰습니다. 코로나라는 특정 상황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이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잇조가리가 엮인 여권은 한 국가의 파워를 의미하는 것처럼요. 권력으로 불평등해진 관계는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어떠한 경계를 만들어내고 특정한 바운더리의 소속감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내면화가 서로의 공존으로 뻗어나간다면 문제가 되질 않았겠죠. 신혜란 교수가 이야기하는 이주에는 이주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을 꼬집고 있습니다. '조선족'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아마 범죄도시, 청년경찰 등 여러 매체에서 비춘 범죄자, 깡패, 위험한 종족이 제일 먼저 떠오를 수도 있을 겁니다. 미디어로 투사된 조선족으로 그들을 정의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족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나 혼란한 시대에 생계를 위해 그저 북쪽으로 이동한 종족이었습니다. 당시 북쪽은 잘 사는 지역이었고, 피난하거나 몸을 숨기기에도 용이했죠. 북쪽에 살다 보니 어쩌다 자신들이 이민자가 되어있었고, 중국인이라기엔 한국에서 왔고, 그렇다고 한국에 살고 있질 않으니 '조선족'이라는 종족으로 분류가 된 것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것도 범죄나 사회적 위협 같은 목적에 있질 않습니다. 친족을 만나고 싶다는 취지로 한국에 방문했다가 새로운 생계를 꾸리게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해 돌봄이나 가사도우미라는 일자리를 창출해나며 자연스레 정착하게 됩니다. 대림역 8번 출구가 유명한 그들의 터전이죠. 영화나 사회가 만들어낸 그들의 이미지는 전혀 그들의 서사와 맞질 않습니다. 범죄율도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높고, 그들이 일자리를 뺏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일자리도 우리의 또 다른 직장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조선족뿐만 아니라, 베트남 여성, 북한이탈주민 등 다양한 이주민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은 가치관에 그치지 않고 선입견과 더 나아가 혐오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주민은 지역을 해치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이주와 같은 사회적 이동현상이 매우 원활합니다. 교환학생이나, 유학, 해외연수나 이민까지. 이주는 이제 강제성이 아닌, 특별한 기회, 심지어는 일상적인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빈번한 이동으로 삶의 경계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자신이 살고 있는 영역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지역의 얼굴이 계속 바뀐다는 말이 나타나고 있듯이요. 하지만 원주민의 터전 혹은, 자신의 경계에 낯선 변화가 부는 현상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변화가 있다면 안주하고 싶은 본능도 동시에 깨어나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안주하고 있는 영역의 변화는 곧 경계의 존재성이 옅어지는 것이며, 영역은 곧 정체성의 산물이기에 굳건히 지키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일으키는 이주민이 침입자로 인식되고, 그들을 부정적인 존재로 단정 짓고 경계를 강화시킵니다.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죠.
본캐, 부캐를 만들어라
세상의 변화는 앞으로 더 심화될 것입니다. 더 변화하면 변화하지, 더 줄어들진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무한히 그어지는 경계, 그리고 그 경계를 반대로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형성되는 인프라는 지금보다 더 발전할 것입니다. 세포분열처럼 끊임없이요. 이주민을 단정 짓는 것처럼, 나와 다른 누군가를 경계하는 경계 짓기는 점차 우리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세우는 울타리는 결국에는 스스로의 고립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존재성을 확립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신혜란 교수는 느슨한 자아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항상 확실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카테고리가 늘 필요하죠. 본인의 성격을 16가지의 테두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자신의 색깔과 패션을 분류시키려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자기 내면을 경계 짓기 하느라 바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는 다른 무언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깎아내림으로써 파생되기도 합니다. 서로를 혐오하고 삿대질하면서 자기만족과 쾌락을 찾는 현 사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요.
이제는 자신을 한정 짓고 규정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조금 내려놓고 느슨해질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일일이 모든 변화에 대해서 대응하고 규정했다간 오히려 본인이 지칠 테니까요.
또한 '느슨한 자아를 위해 본캐와 부캐를 만들어 볼 것.'이라는 또 다른 대안책을 주장한 신혜란 교수.
본캐(본캐릭터): 주로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나, 일상 속의 정체성
부캐(부캐릭터): 평소와 다른 나, 자유롭게 놀거나 실험하는 자아
유동적인 세상은 혼란만 주진 않습니다. 공부만 좋아하던 사람이 우연히 스키를 탔는데 스키선수를 꿈꿀 수 있고, 춤을 좋아하던 사람이 교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변화는 다른 의미에서 가능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를 경계 짓는 건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죠. 그러니 평소와 다른 변화를 발견한다면 무조건 견제하기보다 느슨히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도 해야 합니다. 혼란스러움이 획기적인 발견을 선물할 지도요.
고정적 공간이 아닌, '장소 만들어가기'
공간(space)은 물리적인 영역이나 덩어리를 의미하며, 장소(place)는 공간에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고, 사람들의 기억이나 경험이 덧붙여진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간은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며, 장소는 주관적인 경험과 연관된 구체적인 개념
고정된 실체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따릅니다. 유동적인 실체는 동적인 사고관을 이뤄냅니다. 경계를 짓는 것, 인프라를 형성하는 것, 영역을 구성하는 것 이 모든 행동들이 잘못되고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가 있는 공간을 나와 타인의 권력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부여한 장소로 거듭나게 하는 건 살아감에 있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만들어진 경계가 아니라 경계를 만들어간다는 동사적 사고. 고정적 공간이 아닌,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장소. 일명 '장소 만들어가기'를 신혜란 교수는 또 다른 방안으로 제안합니다. '장소 만들어가기'는 나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체성을 함께 찾아나갈 수 있죠. 즉, 진정한 자기 권력을 위한 길은 '공존'임을 신혜란 교수는 이야기합니다.
이번 강연은 행복을 위해 내가 뭘 해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이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그어본 경계가 얼마나 나를 고립시켜 왔는지, 남을 깎아내리면서 나를 정의하는 행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임을 여실히 깨닫기도 했습니다.
나 사느라 바빠서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걸, 나와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걸 포기하면서 편하게 살려고만 했던 자신이 많이 비친 시간이었습니다. 불균형함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진정한 공존임을. 불완전함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가 완생이 아니라 미생이며, 정답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해 함께 헤쳐나가는 존재임을. 날카롭지만 한 편의 따뜻한 위로를 툭하고 던진 그런 강연이었습니다.
* 본 콘텐츠는 두산아트센터 에디터 활동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