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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가고 싶다고요? 이미 하고 있잖아요!

두산인문극장 2025 : 지역 LOCAL

by yannseo
아, 이민 가고 싶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숨만큼이나 자주 내뱉는 말입니다. 일상의 추임새가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민에 대한 진심이 100%인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투정이랄까요. 이왕이면 파이팅 넘치는 말로 입을 가득 채웠으면 하면서도, 입만 열면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자꾸만 튀어나오는 저 문장. 두산인문극장을 향하던 버스 안에서도 어김없이 나와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두산아트센터의 연극은 버릇이 되어버린 이 한마디를 조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민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요.







소속되지 못한 자와 소속을 잃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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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인문극장이 '지역'의 테마를 내걸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이어 진행 중인데요, 이번에는 공연 <엔들링스>를 올렸습니다. 한국의 작은 섬, 만재도에 살고 있는 해녀 3인방과 지구 반대편 맨해튼섬에서 이민자로 지내는 '하영'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주는 엔들링스. 만재도와 맨해튼이라는 공간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해녀',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타이틀을 통해 이들의 삶을 소속감과 정체성, 그 이상의 차원으로 그려냅니다.


한국에 남은 마지막 해녀, 3명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숨이 끊기면 해녀의 역사가 끊길 상황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물질은 멈추지 않습니다.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거센 바람이 불어오면 불어오는 대로 바다에 뛰어듭니다. 잠수병을 앓으면서도, 나이가 80, 90이 되었는데도 그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 하는 것, 육지로 나아가서 마음껏 즐기며 사는 것, 텔레비전 너머의 할리우드를 동경하는 것, 많은 꿈들을 가슴속에 넣어두고만 말이죠. 섬을 떠나는 건, 죽어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해녀의 삶은 생계가 우선이었던 과거 한국의 시대상과 맞물려, 다른 어떠한 꿈보다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사회상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며 바다로 뛰어드는 행위를 일상으로 만들었고, '해녀'라는 직업은 그녀들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들의 정체성은 섬에 물리적으로 고립되었고, 바다 외에는 다른 삶의 가치들을 포기하며 새로운 가능세계들을 차단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으니 말이죠.


반면, 하영은 이들이 사는 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높은 빌딩이 우거져있고, 문화를 즐길 거리들이 가득한 맨해튼섬은 만재도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하영의 현실은 겉보기에 화려한 맨해튼섬에 융화되질 않습니다. 그녀가 부담하기에는 미친 듯이 버거운 물가에, 백인들의 작품만 판을 치는 작가 세계. 물과 기름처럼 하영과 맨해튼섬은 전혀 섞이질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위치지만, 환영받지 못하면서, 겨우 얹혀가며 사는 듯한 애매함은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듭니다.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jpg 두산아트센터 제공



너무도 견고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해녀들의 삶, 너무도 겉돌아서 정착을 할 수 없는 하영의 삶은 대조적으로 비칩니다. 물리적인 정체성과 정신적인 정체성간의 간극이 절묘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극에도 연극이 이뤄짐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아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담긴 그녀들의 독백을 통한 교차점으로요. 진짜 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마지막 생존 개체, 즉 엔들링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을 찾는 것. <엔들링스>의 이야기는 엔들링스가 되고자 하는 그녀들의 희망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민 갈 곳이 너무 많아서


해녀들과 하영 중에서 어떤 인물에 더욱 공감이 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하영의 이야기에 더욱 동감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독일 교환학생으로 이민자를 잠깐 경험해보기도 했고, 그녀가 극 중에서 하는 대사들이 도전에 도전을 잇는 또래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와닿더군요.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1).jpg 두산아트센터 제공


다들 대가를 내고 이 공연을 보러 왔죠. 이건 일종의 이민이죠.


대가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생기는 결과나 얻게 되는 노력이나 희생·손해를 뜻합니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은 크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먹기 위해서는 밥을 해야 하고, 씻기 위해서는 세안용품들이 필요하죠.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옷을 입고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티켓을 구매하러 가야 합니다. 취업, 이직, 승진 등 사회적 성공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행위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이불 안에만 있다면 이러한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겠지만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방비 상태의 내가 무언가를 위해서 크고 작은 노력을 나에게 가하는 행위 자체가 곧 대가를 치르는 행위입니다.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 결국 우리는 이불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민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감각해야 하는 세상이 너무도 많습니다. 디지털 세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이미 선형적인 인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산수만 배워도 초등교육은 충분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코딩교육과 외국어 교육이 병행되어야 충분할까 말까 하고, 신입사원의 이력서에는 수많은 하드스킬과 소프트스킬이 요해지고 있습니다. 본업 외에 부업도 필수로 요해지는 상황. 멀티플레이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초등-중등-고등-대학-직장이라는 단편적 루트가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크고 적은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며 그 가능세계들을 체험해 나가야 하죠. 그렇게 우리 앞에 놓인 대가는 점점 늘어만 가고, 가야 할 곳이 너무 많은 이민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미래의 아이야 꼭 기억해 두렴. 부동산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극 중에서 하영이 푸념하듯 계속해서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부동산이 필요해.', '부동산을 가져야만 해.'. 부동산, 이 세 글자는 하영의 심정을 그대로 전합니다.


맨해튼섬에서의 하영의 삶은 안정감이라고는 없습니다.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싼 원룸에서는 쥐와 함께 동거를 해야 했고, 본인의 우월감에 빠져있는 백인들 사이에서 유색인으로 살아야 하며, 글쟁이 백인남편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글쓰기밖에 없음에도 동양인의 신분으로는 백인작가들과 동등할 수 없죠. 어떻게라도 그 세계를 파고들기 위해 자신의 피부색을 팔아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은 하영에게 잔혹해 보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굽혀야 하는 잔혹함. 맨해튼에서의 하영은 하영이 아니랄까요. 공허하고 불안정한 한 여성의 몸부림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부동산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jpg 두산아트센터 제공


부동산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제자리에, 오로지 주인만을 위한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주변에 어떠한 변화가 있든, 주인이 그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확실한 보호가 보장됩니다. 부동산이 주어진다면, 나의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변화만 주야장천 해야 하는 바깥으로부터,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치장하며 살아야 하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니까요. 하영에게는 부동산이 그녀의 고향, 그녀의 집이 아니었을까요. 신분, 의식주, 문화는 물론 자신의 신념까지 굽혀야 돈을 겨우 벌 수 있는 하영에게 안식처 하나 없는 맨해튼은 그저 차갑기만 했을 겁니다.


하영의 부동산 타령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관통합니다.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부동산이 존재할까요. 앞으로는 이민자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부동의 가치란 한없이 커지겠죠. 게다가 인간이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개체임과 동시에 확실한 정의를 원하는 이성의 동물입니다. 점차 불완전한 세계는 무한히 열릴터인데, 우리들은 그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지금보다 더 갈망하게 될 겁니다. 형태가 없는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비교적 변화가 없는 재산으로 본인의 가치를 환산하면서 말이죠. 부동산은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확실한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영의 현실이 어쩌면 수억 대, 수십억대로 불어나고 있는 집값을 대변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땅에는 수많은 하영들이 존재하니까요.



돌보다 물에 들어갈 것들이 더 많아


완전하고 싶은 욕망, 완전함에서 비롯되는 안정감. 안정감을 위한 발버둥. <엔들링스>라는 제목이 우리의 발버둥을 고스란히 비춰줍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나로서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데, 막상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정의하기엔 너무도 어렵습니다. 누군가 차라리 정답을 내려주면 좋으련만, 정답이 없는 삶이라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신을 알기 위해 새로운 세상에 뛰어들고, 모험을 하다 보면 여태까지 쌓아놨던 나에 대한 정체성이 계속 초기화되곤 합니다. 그 여정은 비극적일 수도, 희망적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계속해서 이민을 해나갑니다.


'불안함, 불완전함, 미생'. 종종 사회에서는 이를 '방황'으로 치부할 때가 많죠.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분위기. 이러한 분위기가 불확실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함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불완전함이 가져올 가능성들을 배제시키면서요. 만약 우리가 완전한 존재였다면, 지금처럼 넓은 세상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완전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자신을 완성시키는 과정이고, 나 자신에게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하영의 엔들링을 마주하며 조급히 자신을 몰아가는 저를 다독여봅니다.




* 본 콘텐츠는 두산아트센터 에디터 활동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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