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당신은 사랑을 하고 있나요?

한 모금: 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by yannseo
나마저 등을 저버리면, 누가 나의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심히 삶에 허탈감이 들었던 어느 날 오후 무렵. 어떠한 의식도 없이 서점을 방문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온갖 추천사들이 던지는 유혹들에 묻혔다. 그 사이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책을 찾아보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문구 하나. ‘삶을 찬미하는 철학자, 카뮈의 가장 빛나는 문장들’. 알베르 카뮈가 남긴 <결혼, 여름>이었다. 삶을 찬미한다는 건 무엇일까.


교회를 다니며 삶을 찬양하는 글은 수 없이도 봤다. 한순간 눈과 귀를 잃고서도 하나님을 노래하는 작곡가의 곡이나, 궂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했던 다윗의 시, 그리고 기나긴 역사 속 많은 입을 스쳐갔던 이들의 고백들. 나 역시 침묵 속에서 참회와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언제나 완벽한 찬양이 이뤄지진 않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삶을 되뇌다가 문득 나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아무것도 없이 방치된 느낌이랄까. 바다에서 계속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새 찬양한다는 마음은 무엇인지 가늠조차 안 될 때가 있다.


이 책에 유독 시선이 끌렸던 건 망망대해를 떠다닌 나의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카뮈가 남긴 예찬들로 내 잃어버린 찬미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찬미라는 두 글자에 나는 매혹당했다.

한 여름의 뜨거운 로맨스를 떠올리게 되는 제목. 작품을 여러 번 정독하면서, 예상과 다르게 더 뜨거웠고, 미칠 듯이 벅차오르는 로맨스를 경험했다. 로맨스의 주인공은 어떤 등장인물도, 심지어 카뮈도 아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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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나는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아 세상에 투항하고 육중한 살과 뼈로 돌아온다. 태양에 멍하니 취해, 이따금 내 팔을 바라보면 물이 미끄러지면서 물기가 사라지고 마른 피부 위로 금빛 솜털과 소금 먼지가 드러난다. 나는 여기서 ‘영광’이라고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한없이 사랑할 수 있는 권리다.



뜨거운 태양 아래, 신음하는 파도와 대지를 휘감는 바람이 모여든 세계에 카뮈는 본인의 몸을 내던진다. 아무런 지식과 도덕과 의식을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로 티파사와 사랑을 나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세계와 결혼을 결심하며 <결혼>이 시작된다.


적어도 이 순간, 금빛 꽃가루가 춤을 추는 공간을 가로질러 파도가 모래 위로 끊임없이 피어나며 내게로 왔다. 바다, 들판, 고요, 대지의 향기 속에서 나는 향기로운 생명력으로 가득 찼고 이미 황금색으로 물든 세상의 열매를 베어 물어 달고도 강렬한 그 과즙이 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지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보볼리 정원에서는 손이 닿는 곳에 커다란 황금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갈라진 틈 사이로 진한 과육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과 과즙이 풍부한 이런 열매 사이에서,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비밀스러운 형제애와 내 손 위의 주황빛 과육을 향한 허기 사이에서, 나는 금욕에서 쾌락으로, 궁핍에서 풍요로운 향락으로 이끄는 균형 상태를 포착했다. 나는 세상과 인간을 잇는 그 연결 고리와 이중적 이미지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 이미지 속에 내 마음이 개입해서 세상이 인간의 행복을 완성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명확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그 행복을 받아 적을 수 있다.


<결혼>은 짧은 에세이지만, 고요하면서도 격동에 휩싸이도록 하는 에너지가 내재한다. 그가 자연과 연결되면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분명 거룩하다. 그러나 이상한 에로 함이 감도는 느낌은 기분 탓일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표현을 어떠한 세속적인 장치도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마 카뮈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실존주의 사상이 이렇게나 육감적일 수 있다니.’ , 그저 무심코 책을 열어본 독자는 무방비 상태로 그의 세상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알제에서 만난 카뮈의 세계는 육감을 넘어 정신의 차원까지 에너지가 곳곳으로 침투한다. 더 농염해진다기보다는 이상한 고독감이 함께 몰려온다. 오로지 쓸쓸함에서 그치는 고독감이 아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특정한 감정이 몰아쳐서 속이 요동친다. 메스꺼울 정도로. 역겨움에서 비롯한 메스꺼움은 아니다. 마치 ‘나도 그런 적이 있어’라며 미친 듯이 반가워하는 마음에 벅차다 못해 울렁거린다고 해야 할까.


자연의 풍요가 지나치게 많으면 얼마나 사람을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알려면 알제에서 오래 살아봐야 한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거나 독학하거나 발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이곳에는 없다. 이 고장에는 가르침이랄 것이 없다. 무엇을 약속하거나 암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주기만, 아낌없이 내주기만 하면서 흡족해한다.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져서 그것을 누리는 순간 곧바로 그것을 알게 된다.


이곳에서는 삶이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 그래서 심사숙고하거나 발전하려 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가령, 지옥이라는 개념은 이곳에서 그저 사람들이 즐기는 농담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사랑 그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삶을 사랑하는 척한다. 사람들은 삶을 즐기고 경험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정신의 관점일 뿐이다. 쾌락주의자가 되려면 보기 드문 자질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정신의 도움 없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고독과 실존을 동반하여 완성된다. … 내가 말하는 이곳의 삶들에는 사랑이 많지 않다. 아니, 더는 많지 않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그 삶들은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삶을 감각한다는 것,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다는 것. 나는 진정으로 내 삶을 사랑하는가?’

카뮈에게 결혼은 사람을 향한 감정 이전에 자신의 세계에 대한 육체적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알제에서 더 폭발한다.


삶을 살아가는 행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맞대고 태양 아래에서 삶을 불태우고 여름밤에는 불태웠던 시간이 덧없어지는, 그야말로 현재에 충실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비록 뜨겁게 없어진 시간 뒤에 고독이 몰려들겠지만, 하루 종일 머리만 쥐어짜며 당장의 뜨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이 어디 있을까. 카뮈의 알제를 바라보면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던 감정을 괜스레 건드리는 듯하다. 사랑한다고 위장했던 삶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사랑하고 싶었던 삶에 대한 감정을 말이다.








태양처럼 불타올랐던 문장에서, 고독을 통한 응시로


20대 초중반의 젊은 카뮈가 <결혼>에 담아낸 패기 넘치는 고찰은 역시나 20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치열한 젊음을 느끼고 싶은 욕망을 감각적으로 자극한다. 이후 <여름>에 담긴 카뮈의 글에는 조금 더 주름이 져있다고 해야 하나. 더 밀도 높고 더 고독한 사유로 깊어진다.


지금으로서는 조금은 비밀스러운 영혼의 소유자라면, 화장하고 꾸몄지만 감정은 꾸밀 줄 모르고 매력 있는 척하려고 해도 금세 들통나 버리는 젊은 여자들의 행렬과 함께 이 속이 빈 도시에서 떠나야 한다. 고상한 무언가에 전념하라! 아니, 차라리 이것을 보아라. 바위에 조각된 산타크루스 산, 산과 잔잔한 바다, 거센 바람과 태양, 항구의 거대한 기중기들, 기차들, 창고들, 부두, 그리고 도시의 암벽을 오르는 거대한 경사들을.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이 놀이와 이 원태, 소동과 고독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고상함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밀한 이 섬들의 가치는 마음이 스스로 벌거벗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자극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도시. 심지어 추함조차도 이름이 없으며 과거마저 아무것도 아닌 도시를 보면서 감동할 수 있을까? 공허, 권태, 무심한 하늘, 이런 장소가 지닌 매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고독일 것이며, 어쩌면 여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부류의 남자들에게 여자가 아름다운 곳이라면 어디서든 씁쓸한 조국이 된다. 오랑은 그런 무수한 수도 중 하나다.


카뮈에게 수많은 검과 총, 권력이라는 무형의 힘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간 탓일까. 자연과 나눴던 교감보다 무료한 존재들 앞에 서 있는 카뮈가 눈에 사무친다. 주변에 화사한 도시가 감싸고 있더라도 그 안에서 보이는 건, 홀로 서 있는 카뮈의 모습뿐이다. 선과 악,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는 경기장과 영원을 기원하는 기념물들, 이 사이에서 카뮈는 권태와 덧없는 영원성, 그리고 인간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카뮈를 더한 고독 속으로 인도한다.


“오직 근대 도시만이 정신에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한다.”라고 헤겔은 대담히 쓴 바 있다. 이렇게 우리는 대도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을 영원하게 만드는 자연, 바다, 언덕, 저녁의 명상을 의도적으로 잘라냈다. 이제 의식은 거리에만 존재한다. 거리에서만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역사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 세계도, 우위에 있는 아름다움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이를 무시하기로 했다. 플라톤은 무의미, 이성, 신화를 포함해 모든 것을 다뤘지만, 우리의 철학자들은 무의미나 이성만 다룰 뿐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이성의 세계. 자연을 의도적으로 잘라버린 도시. 실제로 변하지 않는 존재를 외면해 버리며, 한순간 침묵 당할 역사적 정신에만 의존한 상태로 도시는 점차 속이 비어갔다. 세상에 대한 성찰을 버려버린 세계에서 카뮈는 고독을 지켜간다. 그래야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것들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고,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의 과업은 자유로운 영혼의 끝없는 불안을 잠재워 줄 몇 가지 처방을 찾는 것이다. 찢어진 것을 다시 꿰매고 너무나 명백하게 부당한 세상 속에서 정의를 꿈꿀 수 있도록 만들며 시대의 불행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해 행복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 본래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과업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되는 과업을 단지 초인적이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지 분명히 알고 설령 힘이 이념이나 안락함의 얼굴을 하고 우리를 유혹하려고 해도 정신을 굳건히 해야 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 우리가 비극의 시대에 살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이 비극과 절망을 혼동한다.


카뮈는 고독으로 세계를 등지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으로 비극을 초래하고, 인간이 영위해야 할 행복들을 걷어찬 세계에서 고독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그래서 카뮈의 <여름> 속 문장들은 차갑고 쓸쓸하다. 그럴듯한 희망과 이념으로 묻어난 세상에 진절머리를 느껴서 그런걸 지도 모른다. 속이 빈 위로보다, 우리가, 그리고 자신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고독으로부터 끌어낸 문장들이다.


<여름>에서 펼쳐지는 카뮈의 고독은 그래서 어둡지만은 않다. 그가 사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 담백하게 와닿는다. 저렴한 묘사와 표현도 아닌 그의 진심이 글자마다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비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절망만은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그곳에서 나는 바다를 바라봤다. 이 시간의 바다는 지쳐버린 듯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오래 달래지 않으면 결국 말라버리고 마는 두 가지 갈증을 해소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하고 싶은 갈증과 감탄하고 싶은 갈증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단지 불운일 뿐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행이다. … 나는 티파사에서 다시 깨달았다. 정의가 마르고 오그라져서, 마치 과육은 시고 말랐지만 겉은 아름다운 오렌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신선함과 기쁨의 원천을 온전히 간직해야 하고 불의에서 벗어난 낮을 사랑 해야 하며 쟁취한 이 빛을 무기로 삼아 다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카뮈는 티파사로 돌아와 다시 한번 현실을 직시한다. <여름>의 끝자락을 장식하는 이 성찰은, 티파사의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세상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용기,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투쟁하기 위한 용기로 그는 세계와의 거리감을 좁혀나간다.


티파사로 시작해 티파사로 마무리되는 <여름>. 나름의 수미상관 구조는 읽는 이에게 텁텁하지 않은, 그러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고통을 회피하지 말라, 꼰대가 아닌 진실한 조언은 바로 이런 것.


<결혼, 여름>은 에세이지만, 여러 번 우려서 음미하고 싶은 글이다. 카뮈가 써 내려간 언어는 독특한 공허감을 준다. 초반에는 그가 그려낸 세계에 닿지 못해 괴리감이 생기고, 최대한 그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어 몇 번이고 곱씹어 본다. 그리고 그 공허에 마음껏 허덕이다 보면 어느새 그의 세계에 다다르게 되고, 카뮈의 심정으로 온몸을 적시게 된다. 이 과정도 역시 결혼과 마찬가지일까.


이 작품을 읽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읽어보라고. 첫 번째 읽기에서는 그의 여정에 동참해 보기. 두 번째 읽기에서는 태양과 바다를 대면하는 카뮈를 바라보기. 세 번째 읽기에서는 카뮈의 자연 속에 나 자신을 던져보기. 그리고 본인의 태양과 바다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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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도 우리와 함께 홀로 남았다. 파도는 보이지 않는 동쪽에서 우리에게까지 하나씩 끈질기게 다가오고 미지의 서쪽으로 하나씩 끈질기게 떠나간다. 시작도 끝도 없는 기나긴…. 하천과 강은 지나가지만 바다는 지나가면서도 머문다. 이렇게 순간적이면서도 충실하게 사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바다와 결혼한다.


모든 인간은 매 순간 항해를 한다. 시작도 끝도 불분명하게 인생이라는 기나긴 항해를 나아간다. 그래서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언제쯤 이 항해가 끝날까, 항해를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무심하게도 넓은 바다를 맞닥뜨릴 때면 나는 순식간에 원초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비참할 정도로 작아진다.


그렇기에 카뮈는 순간적이면서도 충실하게 사랑하라고 한다. 바다가 너무 넓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너무 머나먼 길을 한 번에 생각하려는 순간, 우리는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조차 잃어버린다. 그러니 지금 피부에 닿는 파도에 충실해야 한다. 파도가 들이닥치는 모습, 온도, 색깔 이 모든 것들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도록 한다. 물살이 차갑고, 따갑더라도 파도에 나를 맡겨보자. 그래야 나로서 이 기나긴 항해를 거쳐갈 수 있다.


지금 내 삶에 현타가 오는가? 그렇다면 카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왕 현타가 온 거, 제대로 푹 빠져보길. 남들이 뭐라 하든,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비치든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원초적인 질문에 낯부끄러워하는 그 상태가, 가장 인생이 뜨거워지는 비등점이다. <결혼, 여름>은 태양과 바람, 대지를 통한 육감으로 현재를 감각하는 법을 알려준다. 지금에 호흡하며, 당장 떠오르는 감정, 고민, 사유를 들이마시게 된다.


벅차오르는 풍경 뒤에 몰려오는 허무함과 비참함. 그 속에 발견한 하나의 점은 나 자신이다. 이 점을 외면할지, 직시할지는 본인의 자유, 선택이다. 나는 오로지 권하는 자로서 제안만 할 뿐 선택은 본인들 몫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점을 발견한 자에게는 무한하고도 광활한, 그리고 뜨거운 사랑을 맛볼 여지가 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 뜨거운 사랑을 맛보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찬양임을. 매년 역대급 더위가 갱신되는 그 계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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