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고독하기로 했다

두 모금: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글쟁이 오리
H는 고독하기에 그의 미래이고 근원이었던 책 속에 남아 사랑 하나를 떠올린다.


"웃지 말기, 즐겁지 말기, 기쁘지 말기." 최근 방영한 드라마 '스프링 피버' 속 주인공이 되뇌는 문구가 내 주의를 끌었다. 인생을 바꿀만한 절망적인 일은 어째서 가장 행복한 때에 일어나는 것만 같은지. 지나친 행복은 마음을 불안하게 해서 나는 대체로 고독하기로 했다.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고독은 관성처럼 남아서 좀처럼 떠나질 못한다.


이전에 더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만큼이나 누구보다도 고독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나 자신을 바닥의 바닥으로 끌어내려 세상에 더한 바닥은 없도록 만들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 내게 상처받지 않으려고 고독을 방패 삼는 건 비겁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비겁하게 고독하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의미 없이 흘러간 날들을 후회한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운동하는 것은 계속 운동하려 하고, 정지한 것은 정지해 있으려 한다는 관성의 법칙. 고독의 관성을 깨기 위한 외부의 힘으로 나는 다른 이의 고독을 선택하기로 한다. "카타르시스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교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고통을 악화시켜 낫게 하는 것.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자신이 느끼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으로 위기를 절정으로 치닫게 해 결국 그 고통을 추방하는 것이 비극에서 말하는 카타르시스라 이야기했다. 자신의 비극을 나보다 더한 비극으로 해소하는 것. 그래서 고독을 더한 고독으로 악화시켜 벗어나 보자고 생각했다.


새벽녘 작은 조명 하나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는 일은 타인의 고독을 오독오독 씹어 보기에 가장 좋다. 고독은 주로 고요하고 안온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따라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제목의 책은 맛보지 못한 고독을 선보일 것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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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코 프라하의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와 있다. 지하실 아래 하수구에선 매일 회색 쥐와 검은 쥐가 전쟁을 벌인다. 회색 쥐가 이겨 검은 쥐를 모두 몰아내고 나면, 회색 쥐들이 또다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이유도 모른 채 어이없는 전쟁을 시작한다. 지하실 바깥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인간 또한 쥐들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지금도 어이없게.


시끄러운 압축기 소리 사이를 쥐들의 소리와 역겨운 피비린내가 비집고 나온다. 한탸는 이곳에서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 엄청나게 밀려드는 폐지 더미 사이, <파우스트>, <돈 카를로스>, <히페리온> 같은 책들이 빛을 뿜는다. 그는 책을 집어 코를 박은 뒤 글의 냄새를 들이켜곤, 문장을 숭고하게 읽어낸다. 멀리서 소장이 열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 이봐, 또 일 안 하고 책을 읽고 있는 건가? 그 책을 꾸러미 안에 넣고 <게르니카>,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 같은 작품의 복제화로 둘러싼다. 이 일은 그의 온전한 러브스토리이자, 리큐어처럼 음미해야 할 예술 활동이다.


어쩌면 이 일은 호러 무비다. 결국 그는 책의 도살자. 시대에 버림받은 책을 죽여야 한다. 퀴퀴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나치의 글이 세상에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가 사랑하는 책들을 죽여야 한다. 그 점에서 그는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된 것처럼 고독하다. 2톤의 책 기둥이 복수하듯 그를 덮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지 않으면 잠을 청할 수 없다. 그의 시끄러운 고독은 독서에서 시작하고 그 책을 파괴하는 데서 깊어진다.


그의 시끄러운 고독은 환영을 보여준다. 산등성이를 쉬지 않고 오르는 젊은 예수와 이미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는 늙은 노자. 젊은이는 미래로의 전진(progressus ad futurum), 노인은 근원으로의 후퇴(regressus ad originem)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초록색 버튼이 압축기를 앞으로 밀고 빨간색 버튼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처럼. 근원으로의 전진(progressus ad orginem), 미래로의 후퇴(regressus ad futurum)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고독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는가? 그의 지하실을 찾아오는 집시 여인이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었던. 연이 하늘로 자신을 낚아채 갈까 두려워할 때 둘이 함께 날아오르자 말할 수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마이다네크 혹은 아우슈비츠의 어느 소각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히틀러와 그의 수행원들이 그의 압축통에서 사라지도록, 그에게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했다. 그럴수록 그의 시끄러운 고독은 그의 집시 여인을 떠올린다.


그는 삼십오 년 동안 압축기에 종이를 넣어 짓눌러왔다. 그러나 이제 부브니에서는 수압 압축기 한 대가 그의 압축기 스무 대 분량의 일을 해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은 변화했다. 미래로 전진했다. 그러니 한탸는 후퇴했다. 그때 오래된 질문이 떠오른다. 근원으로의 전진, 미래로의 후퇴는 할 수 없는 것일까. 한탸는 그의 근원인 압축통 속에서 전진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세네카처럼. '미래가 후퇴했고 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 일론카,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는 압축기를 닮은 블타바강으로의 다이빙으로 자신과 그의 지하실을 지키려 한다. 나는 그의 고독을 홀짝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작은 리큐어가 아니라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강이었고, 그러므로 맛보기보다 몸을 담그는 작업에 가깝다. 고독에 몸을 담근 나에게도 그가 마지막 떠올린 일론카라는 이름의 사랑만이 늑골에 남는다. 그렇다, 고독은 일종의 러브스토리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고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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