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 사랑?

세 모금: 레프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yannseo
가슴이 주는 신호를 여태껏 모르는 척해왔다면.



우리는 현 사회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AI로 점령된 시대? 전쟁이 부활하는 시대? 심히 비관답다면 혁신으로 일궈낸 지혜와 이성이 극에 달한 시대라고 할까.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게 여긴다면 그렇다고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찝찝하다. 현 사회를 이야기할 때면, 신을 신고 발을 긁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시대를 규정하는 유창한 프러포즈들은 더는 나에게 곁을 주질 않는다. 세상이 그리는 표상에 끼어들지 못하는 나는 곧 미아다. ‘그들’과 ‘나’로 분리된 논의에는 내가 사는 세상은 담고 있지 않다. 단지 ‘그들이 사는 세상’을 향한 회피와 뭉뚱그려진 어림 정도다. 유랑민 생활이 지체될수록 ‘우리’를 입에 담아낼 용기가 부족해졌다. 감히 그곳에 발을 들여도 괜찮을지, 괜히 땅만 차 대기만 했다. 도망치자고 애꿎은 발에 재촉만 할 뿐이었다.


겉도는 혐오감이 절정에 차올랐을 때였다. 평소보다 극에 달아 목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도망쳤다. 스스로 낸 역겨움이 온갖 알레르기를 일으켰고, 낯 껍데기는 하도 문질러서 화끈거리고 아렸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탈진에 몸을 맡기려던 찰나 어느 낯선 공기가 나의 광란을 깼다. 정신을 겨우 차려보니 먼 나라 사람처럼 보이는 한 노인이 있었고, 날카로운 펜촉을 종이에 긁는 소리가 빈틈을 찾아 메우고 있었다.


만신창이인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봤다.


얼마 뒤 그는 내게 조용히 종이 더미를 건넸다.


앞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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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건넨 종이 더미에는 갖가지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대담하고도 거창한 질문과 달리 내용은 난해한 철학서가 아니었다. 몇 가지 성경 구절을 풀어낸 우화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어릴 적 생각이 아련히 흔들렸다. 밤잠을 설치게 했던 어수선함을 달래준 포근한 이불과 동화를 읽는 엄마의 목소리. 한 노인의 소설은 그 목소리와 함께 포개어져 들려왔다. 죽어가던 심신은 어느덧 호흡을 찾았다.


글감은 누구든지 필히 알 법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봉사, 이타심, 겸손, 용서와 자비, 그리고 공동체성. 책이라면 당연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언어들이다. 일종의 클리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이라면 필수적으로 함께 공유되는 개념들이니까. 그러나 이 진부한 상투어들로부터 숨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찔렀던 불편함이었다. 불편해서 숨을 쉬었다는 희한한 아이러니를 살면서 내 입으로 뱉을 줄이야. 하지만 분명히도 진실이다.


불편함은 단순한 관념 덩어리가 아니었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피상적인 미덕들이 사람의 탈을 쓰며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클리셰답지 못하게, 그 미덕에서 한발 비켜선 삐딱서니들에게 먼저 마음을 주고 말았다.


남편에게서는 곧장 술 냄새가 났다. ‘술에 정신 팔린 거 아닌가 했더니 바로 맞혔어.’ 남편이 농민 외투도 입지 않고 누빈 재킷 하나만 걸친 채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을 보자, 그녀는 입을 다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마뜨료나의 가슴이 철렁했다. ‘돈을 술에 탕진했구나, 어떤 방탕한 놈하고 술을 마셨어. 그러고는 집에 데려오기까지 한 거야.’


가난한 남편이 돈은커녕 방탕한 나체와 귀가한 꼴에 화를 참는 마뜨료나가 대단했고,


‘우리가 이 악당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야 한단 말이요? 이렇게 있다가 같이 죽느니 그런 자를 잡아 죽여도 죄가 될 건 없지 않겠소?’


관리인의 잔인한 폭력 앞에 분노를 토했던 농부와 덩달아 화가 났고,


처음에는 건물을 짓든, 가축을 치든, 모든 것이 빠홈에게 좋게 느껴졌지만, 익숙해지다 보니 이 땅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큰 미래를 설계하는 빠홈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고 여기기도 했다.



주제와는 제법 먼 인물들에 제일 먼저 공감하게 되는 장치라니. 노인이 치사하면서도, 기이하게 파고드는 죄책감은 꽤 불쾌했다. 역시 나는 잘못 살아온 것인가, 하면서도 허공에 대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뜨려 보았다. 인간답고도 진심으로 인간다워서 가슴 한가운데 있는 몽우리가 찌릿찌릿했다.


이야기에 반전은 없었다. 내심 응원했던 이들은 노인이 끄적인 결말에 그들의 에고는 사라져갔다. 가난은 극복되질 못했고, 농부들의 분노에는 보상이 없었다. 빠홈은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자리만 얻은 채 세상을 떠났다.


‘ 형제들, 난 내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만일 악으로 악을 없앨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런 법을 주셨겠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본을 보이지 않으셨나? 악을 없애면, 그 악은 자네 속으로 자리를 옮길 거네. 사람을 죽이는 건 현명하지 못해. 그 피가 영혼에 들러붙을 거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자기 영혼을 피로 더럽히는 것일세. 나쁜 사람을 죽였으니, 악을 없앴다고 생각하겠지만, 도리어 가만히 보면 그건 더 나쁜 것을 자기 속에 끌어들이는 거네. 불행에 져주면, 불행도 우리한테 져줄 걸세.’



분노와 탐욕, 시기심 기독교에서는 이를 죄악으로 명명한다. 하지만 한번도 죄악을 저지르지 못한 자가 어디있을까. 나는 숨쉬듯 죄악을 저질렀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이야기 내내 반항했다. 너무 쉽게 미덕에게 곁을 주는 순간, 나는 더욱 죄인이 되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끝에 달하면서 생각보다 끝맺음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견디기는 어려웠지만, 순순히 납득했다. 분노가 차오를지라도, 탐욕이 끓어오르더라도 결국 나와 비슷하게 생긴 (그리고 완전히 다른) 이들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니, 이들이 있기에 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노인을 만났고, 당신들을 만났다. 온전한 순백은 불가능하기에 어디가 오염됐는지, 오염을 빼낼 방도는 무엇인지. 이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홀로여선 안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첫장을 넘김과 동시에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보낸 인물들은 허상에 가까웠지만, 완전한 허상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직접 사랑을 겪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사용한 사랑의 최면은 거창한 선언도, 요란한 프로포즈도 아니었다. 인물들이 그려내는 감정선에 내 몸을 맡겼다. 그리고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거북함을 움켜쥐었다. 사랑이 시작되는 효시였다.








사랑은 달콤히 오기보다, 불편함을 한가득 싣고 온다.


톨스토이가 묵묵히 전한 사랑 앞에서 온종일 사투를 벌였다. 비겁했고, 결백했고, 치욕스러웠다. 그 모든 공방의 요인은 온전히 나에게 있었다. 그가 꾸며낸 꿍꿍이는 없었다. 불편함의 이유는 종교적 색채, 현란한 이야기 장치, 그 무엇에도 있지 않다.


톨스토이는 정답을 내놓진 않는다. 다만 톨스토이가 들어 올린 펜촉은 생생히 심장을 관통한다.


“마뜨료나, 자네 속에는 하나님이 없는가?”


신의 이름에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얹어본다. 그리고 물음 뒤에 뒤늦게 따라오는 통증에 온 신경을 다한다. 속이 꽉 찬 불편함은 여전히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아직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가지고만 있는다면 멸종은 하지 않을 테니.


사람들은 종종 대 혐오의 시대라며 작금을 칭한다. 그리고 사랑이 멸종해 버린 아포칼립스를 말한다. 대 혐오와 멸종 위기 사랑. 둘을 동의어로 두기엔 빈틈이 어지간히 많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대신 주어에 ‘나’를 빠뜨리지 않은 세상이길 바란다. ‘혐오’는 사랑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 도구로 탁월하다. 대 혐오라는 문구는 은근히 기대기 좋다. 사랑하기 무서운 마음을 쉬이 대변해 주니 말이다.


한 노인이 남긴 불편한 골자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건, 사랑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다른 의미로는 우리는 사랑을 고파하는 미련함에 갇혀있다는 뜻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애써 영리해질 뿐이다.


그러나 노인의 바보스러운 언어 앞에서는 어떠한 영악함도 통하질 않게 된다.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고 조잘 섞인 웃음을 남긴다.


‘얘는 사라지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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