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惟 - 네 가지 생각에 관하여
이번 ‘四惟 - 네 가지 생각에 관하여’에서는 지난 독서 모임에서 받았던 질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책을 읽고 각자가 뽑기에서 뽑은 구성원에게 책을 읽고 떠오른 질문을 건네는 방식은 독서 모임의 매력 중 하나였는데요. 책을 읽고 질문이 생겨나고 그 질문에서 다시 새로운 생각들이 확장되는 과정은 마치 싹이 자라고 꽃이 피어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활동하며 받았던 여러 질문 중에서도 특히 ‘타인의 고통’과‘시지프 신화’를 읽을 때 질문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질문과 구두로 했던 제 답변에 조금 내용을 덧붙이고 재구성하여 네 가지 생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우선 한 사람의 고통이란 어떤 단편적인 상황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통은 그 사람을 둘러싼 상황과 감정, 주변 인간관계 등 다양한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고 봅니다. 그 맥락에는 접점이 있을 수 있기에 공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름 비슷한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맥락이라는 것이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고통이 마치 그 사람 안으로 스며든 것 같은, 맥락 바깥의 타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끔은 아끼는 이들을 위해 그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접점이 없기에 맥락의 바깥에서 충분한 공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게나마 공유할 수 있는 맥락이 있다면 훨씬 공감하기 수월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바깥에 있더라도 하나씩 차근차근 공감해나가는 과정에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 해도 부분적으로 그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온전한 공감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위로와 격려 같은 행동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질문을 받고 나서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온전히 공감하면 그 고통이 나에게 온전히 전달되어 나에게도 똑같은 충격이 가해지는 것인가?”, “온전히 공감한다는 것은 그러면 뭘까?”라는 의문이 끝없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이에 관해 여러 사람과 많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감의 방법이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상황이나 가까운 정도 등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태도는 간단히 결론짓자면 아무래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쓰게 되는 게 당연한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인간관계에서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공감의 방법에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입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길게 경청하는 것. 이 두 가지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편한 환경을 조성해야 더 많은 내용을 꺼내기도 쉽고 그러면 단편적인 것을 아는 것보다 공감의 범위도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단 듣기 시작하면 좀 길게 들어주는 편인데, 이렇게 길게 경청하는 자세가 가져오는 좋은 점은 먼저 어떤 것에 관해 한마디를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부담이나 고민을 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듣다 보면 내용과 그에 따른 반응이 쌓이며 고민과 공감을 이야기하는 이 대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더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대개 그다음에 듣는 입장에서 말을 할 때 더 괜찮은 생각과 표현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또한 개별적이고 부수적인 한 마디에 왈가왈부하여 고민이나 공감의 요점을 헛짚거나 더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일을 나름 줄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민의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도 됩니다. 때로는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다 보니 자칫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대개 그 이야기 자체가 고민의 범위에서 벗어난 내용은 아니지만, 순서의 혼란 등으로 더 어려운 고민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중간에 내용을 계속 되새기며 길게 들어주다 보면 고통이나 고민이 듣는 사람에게, 그리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내용이다.”라고 하는 정리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정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해소와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일단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하며 조금은 길게 들어보는 게 괜찮겠다고 보았습니다. 거기에 중간중간 공감하는 반응이나 이런 이유로 고통이 있고 힘든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는 등의 반응을 더하며 듣는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크게 학교 밖의 부조리, 학교 안의 부조리라는 두 관점으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선 학교 바깥의 부조리는 우리가 연일 매체 등을 통해 많이 보고 듣고 있는데 학생들 역시 그런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미 세상의 많은 내용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접근해서 알 수 있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많은 사건은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도 않은 이들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동시에 경고합니다. 이 사회에 많은 부조리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지금의 세상이 정말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고 부조리란 없다고 말한다면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며 비난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조리를 분명하게 주시할 수 있고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의식과 이를 조금이나마 대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앞으로 사회를 살아갈 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학교 밖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의 방식은 너무나 많기에 그 모든 것을 다 논할 수는 없겠지만 예를 들어 역사 교과에서 가르치는 여러 인물과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들을 돌아보고 기억하며 그다음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교과에서 그러한 대처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학급 회의나 교내 각종 선거 등과 같은, 사회에 나가서도 많이 경험하고 참여해야 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학교 안의 절차나 제도를 통해서도 그러한 능력을 기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학교 안에서의 부조리는 자세히 보면 여러 갈래로 그 기원을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크게 두 가지 구조적인 문제, 정책 결정의 문제에서 오는 경우도 있으며 교사가 세심하게 배려하거나 신경을 쓰지 못해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전자의 경우는 교사가 정책을 결정하는 등의 입장에 서지 않기에 가지는 한계가 있고, 교육 시스템상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기에 당장의 변화를 꾀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후자는 당장 교사가 조금만 생각을 해도 부분에서 오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절차상 익명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일임에도 그것을 가벼이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누설하는 행위, 상담 중 학생들이 처한 환경이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뱉는 행위 등등 어른의 입장에서도 매너가 없다고 여겨질 수 있는 부조리한 행동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학생들에게는 특히나 이러한 부조리로 인한 상처가 매우 클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된다면 학생들의 상황과 입장을 헤아리고, 항상 시선과 생각에 불을 켠 채로 세심하게 생각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부조리들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두 질문에 대한 네 가지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