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하노이에 있게 된 지도 6년 차가 되었다. 오늘은 내가 베트남 하노이에 오게 된 이유를 적어보려고 한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4년제 대학교 베트남학을 전공하였고, 우리 학과는 3+1 그리고 2+2 교환학생 제도가 있었다. 보통 대학교 2학년 2학기 때에 하노이 혹은 호찌민 지역을 정하고 3학년 때에는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는, 해외에서 어학연수도 하고 한국에서의 학력 인정도 받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땐 아버지의 권유로 베트남학 전공을 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베트남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후회도 많이 하고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복잡한 성조에, 어려운 발음에, 동남아시아 언어를 한다는 것이 메리트이긴커녕 창피할 때도 있었다.
내가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2010년 당시에는 베트남이 신흥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베트남 학과 선배들은 서울 상위권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 못지않게 취직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베트남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지방대라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졸업하면 그래도 다른 선배들처럼 먹고살 수는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 열심히 학교를 다니며, 1학년 기숙사 생활에는 베트남 친구 2명과 일부러 같은 방에서 생활을 해보기도 하고, 특히 외부 대외 활동과 교내 도서관 아르바이트 등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2학년 1학기가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무작정 베트남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21살, 베트남어도 하나도 못 하는 상태였지만, 영어를 할 수 있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혼자 비행길에 올랐다. 이미 17살 때에 똑같은 학교 사이클에서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보고자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홀로 비행기에 올라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1년 정도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학연수 및 현지 생활 비용은 부모님께서 적극 도움을 주셨다.) 나는 미지의 세계에 혼자 간다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내 Only 목표는 1년 반 내내 책으로만, 교수님들에게, 선배들에게만 들었던 베트남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앞으로 내가 교환학생으로 갈 지역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첫 베트남 배낭여행 코스는 호찌민-무이네-후에-다낭(+호이안)-달랏-하노이 이렇게 잡았고 말 그대로 배낭 하나 매고 가서, 필요한 옷은 사 입고, 음식은 현지에서 사 먹고, 백패커(여행자 숙소: 한 방에 10~15명 묵는 곳은 하루에 4000~5000원 정도) 모든 여정은 침대 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때 처음으로 여행을 준비하면서 예산을 짜 보고-여행 계획을 짜고-혼자 여행하며 시간을 가지는 방법-나의 성향을 파악하게 된 결정적이고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모든 지역들이 저마다 특징이 있었지만 내가 매겨본 순서로는 호찌민> 다낭> 달랏> 무이네> 후에> 하노이 이 순서로 호찌민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꼭 한 번쯤 살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도시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에 반해 10년 전의 하노이는 정말이지- 어느 시골 동네를 간 것 같은, 그리고 내가 갔을 때가 안개와 비가 자주 내렸던 날씨였고, 당시 배낭여행을 온 후배를 챙겨준다던 마음씨 좋은 유학생 선배님들과 술을 마실 때에도 셔터를 몰래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봐서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유학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도시였다.
결국 3학년에 나는 호찌민에서 어학연수를 1년 동안 하였고, 막상 간 베트남에서의 유학생활은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이왕 간 거니 베트남어는 제대로 하고 가고 싶은 생각에 "한국인, 한국어와의 컨텍은 최소화하고 현지화되어보자!"라고 다짐을 하였고 내 생활 모든 것들을 현지인처럼 바꾸어 살아보는 연습을 하였다.
"2년 동안 베트남어 배웠는데 말 하나 못하냐"라는 말들을 현지인들에게 매일 듣기 일쑤였고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더운 날씨에, 시끄러운 오토바이 경적소리, Nguyen thi minh khai길에 있는 벌레와 박쥐는 기본인 한 달 $250짜리 방 한편에서 매일 세 끼를 현지식 밥으로만 때워가며 어학연수 시간들을 보냈고, 매일 아침은 소 쌀국수 혹은 닭 쌀국수, 가끔 밥이 그리우면 그 국물에 롯데리아에서 산 250원짜리 밥 한 그릇을 넣어 먹기도 했다. 한국 음식은 자주 먹으면 유학생 기준에 비용도 만만치가 않은 데다가 한국에 너무 가고 싶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용돈은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씩 택시를 타고 한인식당에 가서 가장 저렴한 된장찌개 혹은 김치찌개를 시켜놓고 밥 2그릇을 먹고 오기도 했다.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교 베트남 문화의 날 행사 - 함께 호찌민 연수를 갔었던 학과 오빠들과
Nguyen thi minh khai길은 Ho Chi Minh시의 1군에 있는 거리인데, 한인 유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유명한 거리이기도 하다. 집에서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교 까지는 도보로 5분이면 갈 수 있었고, 20-30분 정도 걸어서 나가면 다이아몬드 플라자, 성당, 사이곤 스퀘어, 벤탄시장 등 주요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다양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걸어서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다 (당시 블로그를 했으면 많은 추억들을 되짚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녁에는 베트남어만 가능한 다낭 출신의 법대 대학교 언니에게 과외 수업을 받고, (이 언니의 이름은 Quyen(꾸엔)이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같이 살았던 국비 유학생 베트남인 언니의 친한 친구였다.) 숙제를 하고, 라면과 가벼운 음식을 끓이고 데필 수 있는 포트로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저녁에는 1층 노점 카페에 나와서 씬 또 (베트남 과일 슬러시)를 마시며 외국인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첫 과외 선생님 Quyen 언니 (지금은 법률 변호사가 되었다.)
베트남어 일상 회화에 자신감이 조금 붙었을 때쯤 한국어 강사 아르바이트 일자리가 나와서 알바를 하러 다니면서 나의 베트남 생활은 좀 더 탈력이 붙었고, 유학 생활도 조금 여유로워지고 여행도 많이 다닐 수 있었다. 베트남어가 재미있어지고,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방대 베트남학과 출신이라 항상 혼자의 콤플랙스를 가지고 대외활동에만 전전긍긍하던 내가 처음으로 "서울권 학생들보다 베트남어를 내가 더 잘하면 나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희귀어과 베트남어를 추천해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베트남 유학생활 1년 후 한국에 돌아와 학교를 다니며 쉬는 날에는 베트남어 통역-강사-봉사 등 프리랜서로 일하니 일용직이었지만 베트남과 관련된 다양한 업종에서 좋은 페이를 얻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의료 통역사 과정도 수료를 하고, 무역 신문을 통해 비즈니스 베트남어 회화 연재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4학년 졸업 후의 목표는 연봉을 최소 3600만 원(연) 받아 회사를 다니며 돈을 잘 버는 것이었다.
당시 CJ 해외 법인에서 일하고 있던 언니에게 베트남어 통역을 도와드린 날 (2013년)
이력서를 한 줄 더 채운다는 생각으로 닥치는 대로 나에게 주어진 베트남어 관련 일을 다 해보려 노력하였다. 취업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문득 "관심 없는 다른 분야의 자격증까지 준비하고 시간과 돈을 들여가는 것이 아깝다", "이러려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나?", "과연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고심 끝에 이런 고민을 멘토 교수님께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이 XX교수님께서 "정원아, 우리나라에 국비유학생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네가 잘 준비를 해서 석사과정에 진학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을 해주셨다. 알고 보니 우리 학과에는 박 XX, 이 XX교수님 이렇게 국비 유학생 제도를 통해 베트남에서 석. 박사까지 마치신 분들이 계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이때 석사 과정 장학금에 대해서 더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실,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지방대를 나와 대학원 진학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진로였다. 하지만, 호찌민 유학생활 이후 베트남어 관련 일들을 다양하게 조금씩 해보면서 회사 취업보다는 전문성 있는 베트남 지역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고심을 하며, 장학금 베트남 유학 석. 박사 장학금 제도를 알아보게 되었고 당시 Posco, 대한민국 국비 유학생 제도가 있었다.
내 2살 위 선배 한 명은 이미 Posco장학생에 선발이 되어서 하노이에서 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언니를 롤모델로 잡아 장학금 신청에 걸맞은 서류를 준비하여 냈지만 2014년 Posco청암재단 장학금과 국비 유학생 신청에 대번에 떨어졌다. 서류를 꼼꼼히 다시 살펴봤지만, 날고 기는 서울권 및 스펙이 쟁쟁한 대학생들에 비해서 영어 토익 점수가 너무 낮았다고 생각을 하며 자기소개서에 나의 강점을 뚜렷이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신청하려면 2015년에 신청을 해야 하는데, 1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뭘 해야 하나 막막했다.당시 주말에는 신**어학원에서 베트남어 강의를 했고, 평일에는 명동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예약 담당 및 customer service 파트에서 업무를 맡아 일을 하다가 매니저 언니가 호주-퍼스라는 곳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영어 실력도 늘고 돈도 벌어왔다는이야기를 들었고,"이거다! 1년 동안 호주에서 영어 토익도 올리고, 돈도 벌면서 2015년에 다시 장학금 신청을 하면 되겠구나,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주 Gold Coast라는 곳으로 working holiday를 갈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2014년 8월에 호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러 떠나게 되었다. <자세한 호주 이야기는 아래 블로그 포스팅에>
호주 골드 코스트에서 골드 코스트 해변 앞 흰색 빌라에 쉐어로 살았는데, 매일 친구들이 놀러 오며 일상이 파티였다.
비행기는 타고 갔지만,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호주, 그리고 집 구하는 법도 몰랐던 나는 혹시나 나보다 좀 더 정보를 아는 외국 친구를 만나진 않을까 전전 긍긍하며 Southport역 백패커에서 3달 동안 지냈다. 돈을 벌어야 집도 구할 수 있었기에 이력서를 100통 뽑아 직접 가게에 찾아가 매일매일 이력서를 뿌렸다.
급 떠난 나의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결국엔 정말 정말 성공적이었고, 내가 20대에 경험해 본 것 중 단연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바로 앞이 골드코스트 해변인 하얀색 빌라에서 영국, 일본, 이태리, 칠레 룸메이트들과 함께 생활하였고 아주 운이 좋게도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일자리를 2개나 얻어 돈도 여유롭게 벌었다. 24살이었던 나는 피곤한 줄 모르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일하고, 놀고 경험했다. 해외에 나가서 살려면 영어는 정말 필수요건이다. 어렸을 때 필리핀을 1년 유학 다녀왔기에 기본적인 영어 회화는 가능했는데, 그 경험이 호주에서 빛을 발했다. 결국 나는 주위의 걱정과는 다르게 1년 만에 토익 890점을 호주에서 땄고, 호주와 뉴질랜드 주요 도시를 혼자 여행하고, 발리를 거쳐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나는 장학금 신청의 요건이 다 장착되었고 2015년 국비유학생 제도에 다시 도전을 하였다. 결과는 베트남 지역 전문가 장학금을 받아 베트남 하노이에서 2년 동안의 석사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Q. 그렇다면 왜 석사 공부를 하노이에서 했나요?: 호찌민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베트남의 수도가 하노이이기도 하고, 전문적인 교육이나 인맥, 발음, 학력은 하노이에서 쌓는 것이 좋다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이 있었기에, 하노이에서 석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석사 공부를 하며 지낸 하노이의 느낌은요?: 사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하노이에 생활의 재미는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하노이 사람들의 성향이 아주 폐쇄적이고, 호찌민 사람들에 비해 외국인을 반기는 느낌도 못 받았고요. 처음에는 베트남에 아는 사람들도 없었던 제가 더 깊숙이 베트남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고 많은 것을 배우기엔 많은 한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한정적이었고, 오히려 온몸으로 부딪히며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부동산 업무를 보면서 더 다양한 계층의, 사회에서 일하는 베트남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Q. 언제부터 하노이의 재미를 느끼고 오래 지내게 되었나요?: 아마도 남편을 만나고 난 후인 것 같아요. 석사 졸업 후에, 난생처음으로 베트남에서 아파트에 살아보려고 아파트를 구하다가, 당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났는데, 지금의 남편입니다. 남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 가자, 놀러 가자, 추석이니 추석 빵 사다 주고, 오토바이로 서호 드라이브를 다니고, 현지인들이 다니는 하노이 곳곳 맛집은 다 데리고 간 것 같네요. 당시엔 하노이 관련 블로그나, 정보들도 없어서 버스 타기는 싫고.. 괜히 공산국 가라 무섭기도 해서.. 집 주변, 학교 주변, 호안끼엠 주변만 서성였었었죠. 현지인 남자 친구 덕분에 하노이가 재미있어지고, "내 울타리를 조금 더 벗어나면 재미있는 곳이 많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남편으로 인해, 2년 동안 한정적이었던 학교 안 친구들이 사회에서 만나는 친구들로 많이 바뀌면서 "내가 지금까지 알던 하노이가 다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하노이의 진솔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진로는요?: 하고 싶은 게 아직 너무 많고 새로 시도를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결혼을 하고 아기가 태어나면서 온전히 48시간을 제 시간으로 갖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스킬이나 재능을 살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아요.
-잘하는 것(베트남어)
-좋아하는 것(크리에이팅/글쓰기)
-현재 가지고 있는 기술과 경험(베트남어&현지 유학/ 사업/생활 경험)
위의 특징들을 잘 녹아내어 필요한 분들에게 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언어 학원/베트남 해외 진출 컨설팅 사업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후에 시간이 좀 더 허락해 준다면 베트남 현지인들에게 K-Beauty제품을 소개하는 사업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