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녹여 먹고 싶어. 모조리.
"어떤 슬픔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만 어떤 슬픔은 내 틈새에 스며들어 나를 부서지게 만들거든요. 언젠가 친구가 편지를 써줬는데,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문장이 너무 슬퍼서 조금 울었어요.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좋은 회사에 취업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많이 모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누군가처럼 좋은 곳에 여행에 가야 하고, 좋은 경험을 해야 하고, 행복해야 하고. 이 모든 게 강박처럼 느껴져서 숨이 막힐 때가 있거든요. 좋은 것을 하지 못하면 도태된 것 같고, 결국 평범해진 것 같고, 실패한 것 같고. 사실은 모두 다른 사람이니까 모두 다른 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잖아요. 저는 어른이 된다는 건 우리 모두 평범하다는 걸 깨닫고 그 안에서 다시 내가 고유하다는 걸 느끼는 과정 같다고 생각해요."*
*『디스토피아 댄스』 배수연 작가 인터뷰 본문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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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다는 걸 깨닫고 그 안에서 다시 내가 고유하다는 걸 느낀다….'『디스토피아 댄스』의 주인공처럼, 입안에서 문장을 우물거렸다. 인쇄용 용지가 아닌, 물에 잘 녹는 펄프 지를 상상했다.
소가 여물을 질겅이듯, 오래오래 녹여서 좋아하는 글을 꼭꼭 씹어 삼켜 소화하면, 그 세계도 내 일부가 되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인터뷰 답변지를 읽어내리며, '이런 분이기에 그런 글을 쓸 수 있구나. 춤추듯 유려하고 감각적인 문장을.'
아귀가 맞는 순간 특유의 짜릿함을 즐긴다.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이런 글을 쓰지?'의 해답을 찾는 순간, 너무 좋은 나머지 의자에 반쯤 걸터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혼자 조용히 기뻐한다. 당신의 글이 얼마나 깊이 와닿는지 글을 쓴 당사자에게도, 주위에도 확성기를 대고 소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상하게 울고 싶은 감정도 조금 든다. 스크롤이 짧아지는 게 아쉬워서, 마우스커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굴린다.
"…. 보통 맞서 싸우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잖아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무언가를 기어이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밝게 빛나 보이고,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반면에 도망치는 건 굉장히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것 같아요. 이것도 못 버텨? 이것도 못 해내? 이런 것도 이겨내지 못해? 그런데 어떻게 모두 버티고 이겨내나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리며 그것에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게 인생인데요. 이겨내고 싶지만 이겨낼 수 없고, 버티고 싶지만, 버틸 수 없는 게 나태한 것이 아니라 실은 그냥 살아가는 또 다른 과정이라 말하고 싶어요. 마구 뛰어서 도망친 곳에 새로운 길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요. 피해서 웅크린 곳 바로 밑이 실은 금광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
우연히, 혹은 필연으로 만난 문장 앞에서 속절없이 위로받다니.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에 느꼈던 죄책감. 나를 늘 내리누르는 그 깊은 죄책감을 천천히 내려놓아도 된다는 공증을 받은 것 같다. 가벼워진 마음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춤처럼 유려한 작가의 문장을 통째로 씹어 삼키고 싶다는 기이한 욕망을 느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도피라는 단어가 주는 날카로움이 있다. 듣고 있으면 꼭 벌 받는 기분이다.
‘어쩌려고 그래?’ 누가 물었다.
A: 모르겠는데.
누구: 그럼 거길 왜 가는 건데?
A: ……모르겠는데.
누구: 생각도 없고 계획도 없는데 거기까지 가서 뭘 한다고?
씨발 모르겠는데 자꾸만 물었다. A는 가만히 누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거 현실에서 도피하는 거잖아.”
그것만은 A도 안다.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꼬집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게 또 있을까. A는 앎과 모름 사이에서 흔들리며 누구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죄어오는 것은 자신의 숨통뿐이다.
낡은 책을 찢어 유서 삼으려 한 듯했다. 온통 문자로 가득 찬 종이 한 장을 들고 몇 분을 망설였나. A는 종이를 찢어 입에 넣는다. 썩어가는 것의 맛. 맛이 있을 리 없지. 그러나 A는 아랑곳하지 않고 총 38분을 들여 천천히 그것을 녹여 삼켰다. ‘웩, 토할 것 같아.’ 당연하다. A는 기듯이 화장실로 가 구역질을 한다. 아무것도 토하지 못한 채 깨끗한 변기를 바라본다. ‘이런 것까지 실패라니!’ 탄식이 아닌 순수한 감탄. A는 모조리 실패한 자신을, 거울을 통해 들여다본다. 생각한다. 참 보잘것없다고.
(중략)
문득 여기서 유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종이… 없다. A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펜… 진짜로 없다. 결국 A는 다시 책을 한입 크기로 조금 찢어, 입에 넣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 종이가 쉬이 구겨지지 않는다. A는 종이를 입에 넣은 채 저 너머를 향해 걸었다. 건물의 앞인지 뒤인지 모를 곳에 풍경이 놓여있다. 연못. 그 뒤로 나무들. 그 뒤로 산. 조금의 집들. 구름. 하늘, 하늘, 하늘……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에 A는 난간에 매달린 채 눈물을 흘린다. 입술에 걸린 눈물을 혀로 살짝 핥으면, 종이가 녹는다. 저 너머의 산을 한 입 삼켜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썩어가는 종이와 같은 맛이 날 것이라 확신하며.
빨간 다리를 건너며 한 번 뒤를 돌아본다. 규슈의 어느 곳에서는 다리를 건널 때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는데, 이곳에는 그런 게 없는지 생각해 본다. 못 들은 것 같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며 A는 줄곧 내려와, 문을 넘어선다. 다시 도로로 나온다. 그제야 자신이 처음에 반대로 걸었다는 걸 알았다. 다리가 아픈 게 조금 짜증스러워,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선다. 이번에야말로 버스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버스가 온다. 하필 이럴 때만 그렇다.
(중략)
역을 등지고 앞으로, 더 앞으로 걸어가면 사람이 몇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 A는 그들과 자신이 완전히 다르다고 여겼고, 그 다름에 추진력을 실어 걸었다.
특별하다는 건 어쩐지 외로우면서도 기쁘다. 기쁘기 위해서는 외로워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슬퍼지지만, A는 슬픔보다 외로움보다 그 찰나의 기쁨에 중독된 것처럼 굴었다. 뭐든 상관없다. A는 더 이상 자신이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략)
“괜찮아요.”
거짓말.
멍청하다.
A는 확실히 멍청하다.
그런데 그게 나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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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와 나비> 대표 김하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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