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호박을 지키는 일_1인 출판사 대표의 밤_ 06

지독한 위로, 나의 영혼을 위령(慰靈)한 문장들

by 김하녹 Ha Nok Kim

"아직은 저에게도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독자 분들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가 실감 나지 않지만, 세 사람의 아지트에 깃든 이야기를 들여다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결코 소멸하지 않는 과거가 현재에 깃든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


*『마주치면 돌이 되는』수록작 <우리들의 유령> 이지우 작가 인터뷰 中 발췌




처음에는 남겨진 사람 혹은 -것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겨진 무언가를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의 이야기도 한데 어우러져 담겨있었다. 작품은 뜨거운 마음으로 감상하고, 편집은 얼음같이 차가운 칼날로 문장을 벼려야 한다고 했는데, 차가운 이성은 아름다운 이야기 앞에서 눈 녹듯 녹아버려 이내 눈물이 되었다. 왜였을까.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는데 왜 눈물이 날까. 떠나지 못한 이의 죄책감을 함께 짊어지는 남은 자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고 깊고 다정한 것일까. 얼마나 깊을지 몰라서 차마 그 안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촉박한 마감 일정 속에서도, 매 순간 마주하는 '우리들의 유령'의 문장은 나의 영혼을 위령했다. 지독하게 위로받았다. 그러니 사랑할 수밖에.




『마주치면 돌이 되는』수록작 <우리들의 유령>_이지우 작가


(중략)


“호수랑 대화를 좀 나눠야겠어.”

유담은 나에게 호수와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절대 눈을 뜨지 말 것을 당부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유담의 말들을 귀로만 들었다. 사실상 대화보다는 주술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흔들리는 방울의 날카로운 소리와 유담의 말소리가 겹쳐 들렸다. 유담은 지금 어떤 걸 보고 있을까. 호수의 영혼이 짓고 있을 표정도 궁금했다. 나는 실눈을 뜰지 고민하다 유담의 당부를 다시 새기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평소의 나는 무속 신앙을 믿지 않지만, 당장 영혼이 보이는 마당에 마냥 삐딱하게 굴 이유도 없었다. 유담은 이따금 대답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추임새를 넣었다. 유담이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눈을 감은 나는 왠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 귀에 선명히 들리는 지금의 상황은 분명 꿈이 아닌데도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꿈처럼 느껴졌다. 유담은 한참을 몽롱한 기운에 젖어 있던 나에게 강하게 말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호수는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할머니의 호흡이 그날따라 불규칙하게 들리던 것이었다. 호수는 왠지 곁을 비우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에 오래도록 지켰다. 오랜 무의식에 빠진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앉아 있던 호수는, 그 손아귀에서 영영 놓여나지 못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호수는 아직 온기가 남은 할머니의 손을 매만지다가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호수의 어머니는 오후에 공인중개사 일을 마무리하고 야간에 목욕탕을 청소해야 했다. 모든 건 할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여린 호수의 등 뒤엔 언제나 어머니의 구부러진 등이 겹쳐 보였다.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이 호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 고개를 든 생각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할머니만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조금은 덜 불행하지 않았을까?’ 호수는 스스로 되물었다. ‘정말 할머니가 죽길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 호수는 마지막까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조용히 할머니에게 달린 호흡기를 떼어낼 뿐이었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호수는 자주 반복되는 악몽에 갇혔다. 따뜻하던 할머니의 손이 어느새 뱀으로 변해 호수의 목을 조르는 꿈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아지트에 모인 날 밤, 호수는 좋아하던 폭죽으로 아지트에 불을 옮겨 붙였다.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 무기가 되자 꽤 큰 규모의 불로 변했다. 사고가 뉴스로 보도된 후에는 그 중심에 있던 우리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호수가 홀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사를 통해 알아야 했다. 사고 이후 몇 주 정도는 호수의 병문안을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우리를 쉽게 잊었지만, 나와 유담에게는 그 이후로 뉴스를 보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남겨진 우리는 나름대로 호수가 아지트에 불을 지른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깊이 잠든 호수는 우리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마침내 유담이 의식 비슷한 대화를 끝냈고 나는 깊은 잠에서 깨듯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후회 안 해, 넌?”


(후략)




[공지] 결코 소멸하지 않는 우리들의 유령을 마주할 시간






이지우 작가님의 <우리들의 유령>이 남긴 매캐한 연기와 서늘한 위로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닿았기를 바랍니다. 상실과 죄책감, 그리고 그 모든 과거를 끌어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3월 21일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이어가려 합니다. 무거운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오세요. 북토크 현장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달래줄 소박한 굿즈와, 우연처럼 다가올 문장들이 담긴 '비밀의 QR코드 뽑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장 판매 대신 준비한 이 작은 의식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지독한 위로의 문장, 먼저 만나기 (직판 폼 링크): https://witchform.com/payform/?uuid=BMLTTYFP4M


✔︎ 북토크 <마주치면 돌이 되는> 참석 신청: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yTeQ5xJZumd7Kh-95J5WMIlZRj8aOAECdPRQQxOD8f5iNOw/viewform

*일시: 2026년 3월 21일 (토)

*장소: 마포중앙도서관 6층 세미나실 오후 3시-5시


빵과 장미와 나비 출판사 : https://inkrebelbrc.imweb.me/

인스타그램 : @inkrebels_brc

@hanokdraw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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