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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Jan 27. 2020

독일은 범죄자의 신상을 숨겨줄까?

일반화와 예외의 차이가 주는 불편함,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변수

주제가 점점 험해지는 느낌이다. 나라고 골치 아픈 주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나도 가벼운 거 좋아하고 마음 편한 게 제일이다. 그런데 나만 특별하게 사회 문제의식에 눈 떠 있어서 이런 주제를 고르는 것인가? 그것보다 진실은 좀 더 웃기고 쉽게 말해 하찮다 (뭇사람의 동기가 주로 그렇듯이). 나는 특히 컴공 학과에 취직하고 난 후로 연구분야가 인터넷 혐오, 악플, 헛소문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전에도 온라인 포털과 게시판을 훑는 것을 이상하리만치 재밌어했다. 답답한 산파극 드라마를 꾸역꾸역 보면서 퍽퍽한 고구마를 물 없이 욱여넣는 느낌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느낀다는 이유로 현재의 연구분야에 다다른 거겠지만, 아주 가끔씩 열린 대화의 희열을 얻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정확한 객관성과 정보의 공유가 인터넷 유저 간의 촘촘한 망으로 이어질 때, 인터넷 낙관론이 그리는 세계가 공감된다.


각설하고, 문제 공론화가 이루어지는, 즉 소소하지만 뚜렷하게 몰리는 의견 표출이 종종 도드라지는 곳이 인터넷 게시판 내지 댓글이다. 사안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 거의 한 목소리로 모아질 경우는 주로 다음의 요소가 충족될 때다. 인간적 두려움 내지 억울함 같은 즉각적인 감정과, 개개인이 스스로 직관적이라고 여기는 윤리의식 (다시 말해 그 아래 숨겨진 실체이며 감정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맡는, 그리고 마치 유행 타듯이 꾸준히 바뀌는, 논리 규격의 트렌드에 따른 본인의 반응이다).


무엇에 대해 사람들이 화내는지, 그래서 몇 자라도 타이핑해서 익명으로 발행하는 행동을 하게 하는지 이해하려고 하면 그 나라에 대해서 많은 걸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이 실제 사회 인구의 일대일 표본이 아니라는 사실은 감안하며 말이다 (연구자들은 인터넷 데이터를 추출할 때마다 이러한 "표본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한국 뉴스를 볼 때 신기한 것 중 하나는 범죄자 내지 혐의자들의 기사 사진이 찍히는 것, 그리고 찍히는 사람들이 얼굴과 손목을 칭칭 가리고 나타나는 것이다. 여러 이유와 보도할 의무 등이 있겠지만 빵에 버터를 한 곂 바른 후 다시 박박 긁어내는 것처럼, 찍는 행위의 기능적 의미는 상쇄된다고나 할까. 이런 가볍고 별 내용 없는 내 감상은 차치하고, 최근에 한국의 강력 범죄자의 출소 후에 그가 누군지 알 권리, 즉 얼굴 공개를 거부해서 보호받을 권리에 대한 반발로 인터넷 상의 의견이 모아지는 양상이 있었다. 


독일은 어떨까? 대답을 얻는다면 한국에서 무엇이 맞는 건지에 대해서 추가 정보를 얻는 길이 될까? 나를 포함해서 독일을 안다고 (척)하는 일명 전문가들의 몇 마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그럴수록 정보의 오류도 (내가 돌팔이가 아닌 줄 어떻게 알고?) 내 입맛대로 콕 집어 해석한 정보의 일부분을 전달받는 위험도 다분하지 않을까? 신문도 여러 편향이 있고 기자들도 인간이기에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우리 함께, 원서에 최대한 가까운 정보를 읽으며 분별력을 키워보자. 물론 나도 바쁜 사람이고 그대는 아마 나보다도 바쁠 것이고, 나의 정신력은 제한적이어서 길고 포괄적인 글을 읽고 싶어 할 때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최대한 쉽게, 읽기 가벼운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함께 기사를 읽어보자. 어차피, 남의 나라 얘기니까. 


기사의 작성자는 함부르크 출신 미디어 변호사로서, 2019년 연방 헌법 재판소에서 살인자를 대변하여 익명성의 권리를 얻어냈다고 한다.


1981년에 약 3주 전, 그란 카나리아에서 출항했던 범선 한 대가 바르바도스에 도착했다. 선상 위에서 범죄가 벌어진 후였다. L 씨 (가명)는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2명의 남자를 살인하고 한 명에게 상해를 입혔다. 그는 일 년 후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범죄사건은 크게 알려지고 미디어를 강타했다.


오늘날 L 씨는 죗값을 치렀다. 20년간 감금되어 있었다. 2002년에 출소하여 소위 자유인이 되었다. 하지만 검거되었던 살인자가 누려도 될 자유는 어디까지일까? 우리들 가운데 어우러 살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본인의 범행을 끊임없이 상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나의 간청에 의하여 연방 헌법 재판소가 이 질문을 조사하기로 했다.


사형죄를 뛰어넘었음을 응당 자랑스러워하는 독일에서, 위의 질문은 새롭지 않다. 독일의 형벌 집행 체제는 유죄 판결자들의 재사회화 및 교화를 향해 구축되어있다. 형량을 끝낸 범인들은 다시 시민이 되어야 하며, 이는 모든 책임도, 모든 권리도 포함한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로 인해 허구한 날 언론 노출에 시달린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후 시절에 벌어졌던 유명 범죄 사건을 조명하는 TV 프로그램에 본인 동의도 없이 본명 및 얼굴 사진과 함께 주인공으로 다뤄진다면, 아침 빵을 사러 가는 길이 가시방석이 되어가며, 점점 자신을 은폐하다가 생활을 영위하기 포기하게 된다. 만약 오래전 재사회화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다시 "탈사회화"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연방 헌법 재판소는 1973년에 이미 결정적 판결을 내린 적 있는데, 소위 레바흐 판결이라고 부른다 (1969년에 네 명의 군인이 수면 중에 살인을 당한 장소의 이름을 따른다). 이에 의하면 잊혀지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는 없지만 (범인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자신의 범죄를 언급하지 말라고 무분별적으로 요구할 수 없고, 그의 범행은 역사 중 하나의 사건으로 남아야 한다), 대신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전면적 관심에서 잊혀져야 한다. (레바흐의 범인을 포함한) 시간이 지나면 익명성의 권리를 얻는다. 본 원칙은 여라 다른 판결에서 구제화되고 일반적으로 인정이 되었다. 이후로 법원들은 이정표가 되는 규정들을 보유해왔다. 디지털 개혁이 도래하며 초래한 갈등들이 확립된 판결의 틀을 깨기 전까지 말이다.


내 의뢰인인 L 씨는 그러한 갈등의 중심에 처했었다. 그의 어두운 과거를 아는 소수의 지인 중 한 명이, 인터넷에서 그의 범죄에 얽힌 이야기를 클릭 몇 번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L의 이름을 검색하면 신문사 자료실에 숨겨졌던 법정 재판 보고서가 뜬다. 자료실의 디지털화로 인해 검색 포털 사이트들이 자동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되었고, 순식간에 공개됐다. 구글에서 검색할 경우 거이 처음으로 뜨는 자료다. "폭로당할" 위험이 노인에게 편재적 위협이 됐다. 이웃과 마주쳤는데 왠지 급하게 지나쳐 가버리는 듯할 때, 혹은 사교댄스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까?


견딜 수 없게 되자, L 씨는 옥살이 후 힘겹게 구축한 그의 소박한 삶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판결 이후로 법과 연루된 적이 없으며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그는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법정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L 씨의 요청은 받아들여지는 듯했지만 시기상조였다. 의뢰인의 과거를 손쉽게 조회 가능한 자료실의 소유자인 출판사를 향한 금지 요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료 삭제를 거부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방 법원에게 탄원했다. 그곳에서는 레바흐 판결에 기반하여 출판사를 상대로 1981년의 범죄에 대해 의뢰인의 이름을 기재한 채로 보도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고등 법원 또한 판결을 승인하며, 최고 법원이 해당 법률문제들을 해결했다는 가정 하에 상대편 (출판사)의 상고까지 불허했다.


출판사는 이어서 연방 재판소에 탄원하자, 연방 재판소는 한 방에 하위 법원들의 금지령을 취소했고 내 의뢰인의 소송을 기각했다. 2012년 크리스마스 전, 소송 위임권을 지닌 나에게 연방 재판소의 판결이 전달되었는데, 해당 민사 합의부는 TV 및 언론 보도와 인터넷을 따로 구별하고 있었다. 정통 언론을 위해 개발된 레바흐 규정을 변경할 의도도, 디지털 신문물 미디어에 적용할 의향도 없었다. 온라인 자료실 상의 이름 기재는 해당 개인에게 큰 타격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런 류의 인터넷 보도의 경우 "수동적 보도의 형태"로서, 독자층에게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터넷을 검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뢰인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한 디지털 검색을 할 가능성을 항시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2012년 크리스마스 휴가는 연방 헌법 재판소에 올릴 항고를 준비하는 데에 고이 썼다. 2013년 초에 제출했다. 약 6년 후인 2019년 11월에 연방 헌법 재판소의 상위 합의소가 드디어 항고를 허가하는 동시에 법률을 여러 면에서 발전시켰다. 살인자 L 씨의 개별적 사례를 큰 도약으로 삼은 것이다. 결과적 법률의 내용은 "잊혀질 권리 II"라는 항목 아래 독일법과 유럽법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급진적 규명 및 인지를 내포한다. 그리고 인터넷 상의 잊혀질 권리에 대한 주요 법규를 명시함으로써 낡은 레바흐 판결을 디지털 시대를 위해 갱신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법학자들이 충분히 다룰 것이다. 개인을 향한 보호 개선의 필요성의 편을 든 법원은 새로운 발견에 의거했다기보다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재해석했다. 즉, 온라인에 올린 개인 정보의 지속적 접근성과, 검색 사이트에 이름을 입력하는 것만으로 언제든 조회 가능하단 사실이다.


이는 곧, 의도적으로 검색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의뢰인이 노후 연금에 더한 용돈을 벌기 위해 광고지 배달 지원을 했을 때 광고자 회사 직원이 그의 이름을 검색하다 오래된 기사를 찾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래야 하나? 이래도 되나?


연방 헌법 재판소는 이러한 질문을 완결하지 않은 채 법적 논쟁을 다시 연방 재판소로 반환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본 사건과 미래의 연관 갈등들에 대한 이정표는 생겨났다. 첫째, 언론은 자발적으로 자기 검열을 통해 자료실의 오래된 기사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허용되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확인의 책임은 해당 피해자의 정식 항의를 전제로 하며, 이는 예를 들어 내가 2012년에 L 씨의 요청에 따라 출판사를 향해 탄원한 금지 요구 같은 것이다.

  

둘째, 옛 기사가 개인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의 정도에 따라 보호의 권리가 가중된다. 셋째, 피해지가 그간의 행실로 인해 이전의 사건이나 본인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는지도 감안한다. 즉, 잊혀질 권리에는 "잊혀지기 원하는" 행실도 포함된다.


확실한 것은, 뻣뻣한 양자택일로 해결될 갈등은 아니다. 분명한 건 이것뿐이다. 법원은 보호 보장의 수위라는 것을 말한다. 소송 과정에서 개입된 전문가들은 검색 사이트를 차단할 기술적 방법도 제안했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기사 전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보호할 이름의 검색만을 의도적으로 막는 것으로서, 주제에 대한 검색을 할 경우에는 조회가 가능하도록 두는 것이다.


이를 위한 어떤 해결책들이 실행 가능한지 알아내는 것은 연방 헌법 재판소의 책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전문 법원들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이러한 보호 조치들의 정당성에 대한 조사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조치들은 수고와 지출을 동반함이 허락되지만, 언론사들이 개인에 대한 보도를 꺼리거나 온라인 자료실을 제공하기를 꺼릴 정도의 규모일 수는 없다.


B 씨는 바로 이 권리를 위해 싸우는 나의 또 다른 의뢰인이다. 그는 자수성가의 모범 예시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이미 여러 분야와 나라에서 성공을 거둔 중에, 동남아의 특수 시장에서 그렇다 할 성과를 창출하지 못하던 거대한 기술 기업과 협업을 시작했다. B 씨는 분석가들을 고용하고, 시장을 조사하고, 여러 결정권자들을 찾아내며 수요를 탐사했다. 그의 개입으로 거대한 국가사업을 따냈다. 수익 분배로 인해 그는 확실한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하며 비슷한 후속 사업을 목표로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가 주목하는 국가에 사기성이 짙은 컨설턴트들이 뻔뻔히 기회를 염탐하며 뇌물 납부를 통해 사업을 끌어오려고 했다. B 씨는 그것이 보기 싫었다. 그는 비리를 반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형성한 인맥에 방해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B 씨는 "그 얼간이들"에 대한 컴플레인을 걸기 시작했다. 현지 파트너들부터 시작해서 기업 내부로, 그리고 기업 간부급 인사에게까지 불만을 전달했다. 반응은 약하다가 점점 성가심으로 변해갔다. B 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간부들을 몹시 귀찮게 했다.


B 씨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 찰나에 기업이 중대한 비리 사건에 휘말리며 전국적 형사 소송 절차가 열렸다. 독일 본부에서 세 명의 중간 관리자가 검거되고 후에 형을 선고받았다. 세 명의 범죄자는 경찰 조사 중에 남을 탓하기 바빴는데, 그중 공교롭게 B 씨가 뇌물을 납부하였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비리를 크게 규탄한 인물을 말이다.


B 씨에 대한 수사 절차는 진행조차 되지 않았다 (혐의가 너무 밑도 끝도 없었기에). 하지만 명예 훼손을 담은 조사서는 언론에게 흘려졌다. 유감이지만 흔한 일이다. 가짜 혐의는 어느 경제 신문에 의해 출판되고 B 씨는 질타받았다. 신문은 증거조차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충분한 혐의 기반이 존대하고 혐의자가 글에서 미리 판결받지 않는 이상, 언론은 혐의에 불과한 것에 대해 보도할 수 있다. 혐의 보도는 그로서 법적으로 정당하고 제한 없이 온라인 자료실에서 제공될 수 있다. 내 의뢰인의 경우처럼 혐의가 오래전 증발했음에도 불과하고 말이다. 연방 헌법 재판소가 허하는 권리는 오직 하나, 수사 절차가 정지되었음을 명시하는 글귀를 자료실 기사에 더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수사 자체조차 없던 내 의뢰인에게 도움이 될 리 없었다.


B 씨가 최근에, 그러니까 모 경제 신문이 기사를 내고 약 10년이 지난 후 계좌를 개설하자, 오래된 그 기사를 갑자기 은행에서 들이밀었다. 그의 이름을 입력해서 손쉽게 검색한 결과였다. 우리는 함께 힘겨운 노력을 들여서 사실의 복잡한 경위를 밝힐 수 있었고, B 씨가 은행을 거덜 내러 온 사기꾼이 아니라는 설득에 성공했다. 얼마나 많은 잠재적 사업 파트너들이 B 씨의 정보를 찾아낸 후 아무 말 없이 그를 피했을지, 혐의에 대한 대담을 애초에 외면했을지, 도무지 모를 길이다.   


이래도 되나? 증빙된 무혐의자가 결국 이전의 혐의자로 검색 결과에 나타나야만 하나? "잊혀질 권리 I"판결까지만 해도 그것은 현실 존재하는 법률 상태였다. 하지만 헌법 판결의 사유를 참고한다면 대답은 '아니오'다. 역으로, 그럴수록 더 안된다. 언젠가는 공식 법률의 형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B 씨의 사례 또한 연방 헌법 재판소에게 올렸다. 어쩌면 그것이 조만간 "잊혀질 권리 III"판결이 될 수도 있겠다.


법률번역은 처음이다. 후반보다 전반부가 힘들었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소감이지만 나는 변호사는 못할 것 같다.


석사를 하며 한국에 머물던 시절 멋모르고 LEET 시험을 쳤다가 강렬히 전사한 전적이 있다. 살면서 시험을 진지하게 친 적은 몇 없지만 법학 및 로스쿨 재원들에 대한 인정은 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더욱더 위와 같은 글은 다르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모르면 몰라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두 가지의 같지만 다른 경우를 같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처럼 느껴진다. 판결에 한한 의미에서야 같은 사례일수 있지만, 사람이 정말 법정 앞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을 상대로 한 대중적 기사에서 법학 로봇처럼 글을 쓸까.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며, 인터넷의 도래로 인해 자유와 검열의 공공 대 개인의 필요가 새로이 얽히며 충돌하는 것도 맞고, 법이 그에 따른 개선의 필요를 인지하고 실행한다는 것은 필히 지지할 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명실상부 동양인 즉 소수민족으로서 독일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본인 혹은 본인의 자녀들이 유학을 해서라도, 혹은 조기유학을 해서 독일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갑자기 은근한 인종차별적 모욕을 당한다고 치자. 그러면 그 모욕을 지우고 모욕한 사람을 차단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피해자로서 정당할 수도 있지만, 표현이 애매하거나 중의적일 경우 상대가 섣불리 검열당할 수도 없는 문제인 것이다. 인터넷에는 이런 류의 문제가 매 초, 매 분마다 수도 없이 발생하고, 미처리 시 플랫폼 운영자들에게 이미지 손실이나 고객 감소 그리고 최악의 경우 국가가 때리는 벌금의 형태로 날센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때문에, 자동화된 신고와 처리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 이는 바로, 우리의 귓전에 참 많이도 들려오고 있는 "AI"의 영역이다. 그러면 AI가 개인의 자유, 사회적 편향, 현행 법률의 의도, 그리고 알고리즘적 가능성과 한계까지 모든 비중을 상호 계산한 후, 합당하게 판단까지 내려줘야 할 날이 도래할거라는 얘기가 된다. 


인간에게도 최상위권의 문제 난이도인데, 기계는 어련하리.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 관련된 검열 권리의 사례는 그 사이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을 자세히 기술하고 분류해야 기계의 알고리즘을 정밀히 훈련시키는 초석이 마련된다. 즉, 인간이 사례를 개별적으로 구성하는 사회문화적 변수까지 제대로 분류해야만 기계도 그만큼 알까 말까 할 거라는 뜻이다. 


위 기사에 언급된 두 사례는 결이 많이 다른 것 같다. 결론과 별개로, 범죄자의 죄질에 따라서 발생하는 사회적 반발이 분명히 더 존재하고 다뤄져야 할 텐데, 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저자의 책임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고 이는 비판 거리가 안된다. 결국 케바케, 즉 사례마다 고민할 요점은 항상 새롭게 생긴다는 정설만이 항상 그렇듯 유효하다. 저자가 언급하는 의뢰인의 범죄 동기와 죄질에 대한 판결이, 미래의 다른 의뢰인의 동기와 죄질이 더 나쁘다 할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지에 대한 대답은 현행 법률상 (우선은) YES다. 하지만 사회적 반향이 더 클수록, 대표적으로 아동 성범죄자처럼 사회적 반향을 점화하는 간접적 요소가 더 많을수록, 법률의 공격 면적에 조약돌이라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법은 항상 불완전한 상태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상태를 무리 없이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변호사를 해도 될 것이다. 하긴 학문도 마찬가지다. 영리적 이익이 비교되지 못한다는 점이 있지만 그만큼 종신이라는 골든티켓이 기다리고 있으니 길게 보면 쌤쌤이지 싶다. 판검사는 그 중간지점 어딘가겠거니 싶지만 이건 나중에 더 알아봐야겠다. 


결국, 기자가 쓴 기사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직업적 동기와 고유한 논리의 정체는 언론 매체에 항상 녹아들어 있고, 이 불변한 법칙은 우리가 어떤 기사를 읽을 때든 나름의 해석을 가해야만 함을 계속 상기한다. 변호사의 경우 아무래도 돈의 법칙과, 규범 논리의 효율적 적용이라는 스킬의 구현이라든지, 그로 인한 보람이나 명성의 추구라던지, 이런 것이 주 원동력이라는 가정을 하자. 그렇다면 이런 기사의 경우 독자는 저자 의도의 체계를 명함처럼 읽어내기 쉽다는 이점이 있다. 반면에 기자의 목소리는 동기에 의한 의도를 더 은밀하게 표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번역한 기사는 "초보자 입문"용이다. 프레임 읽어내기 전공 학위라는 과정이 만약 존재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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