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nzlerin Sep 26. 2020

AI라고 불리는 것의 대중적 소통

연구자와 사회의 점점 더 숨막히는 동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빅데이터라는 단어의 홍수가 있었다. 지금은 홍수에서 시냇물로 축소된 편이다. 서점과 매체, 심지어 대학과 연구까지 빅데이터라는 키워드를 짠 하고 던지면 문과 지갑이 열리는 시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요 근래는 그 유행이 새로운 유행으로 대체되었다. AI라고 하는 기술적 비전이 위와 같은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또다시 도서와 매체, 대학과 수백억 단위 예산의 연구기획서들이 이 단어를 테이블 위에 던지고 있다.


사실 단어만 바뀌었을 뿐이지 (앞으로 또 바뀌지 않을까?) 그 안에 내포된 도전과 우려, 가능성과 기술들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나는 2년째 컴퓨터 공학 부서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만큼, 그리고 뜬금없이 정치학 전공인 만큼이나 인문학적 시야를 가지고 이런 연구 동향을 안쪽의 인사이더들 사이에서 지켜보고 있다.


문과 배경들이 잘 모르는 (하지만 느끼는) 사실은, 빅 데이터도 AI도 다소 부풀려진 단어라는 것이다. AI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 엄밀히 따지면 기술적 얘기가 아닐 때가 많고, 그보다는 상상 속 기술의 시나리오를 얘기하는 때가 많은데, 얘기하는 사람이 기술에 대한 실무적인 감이 없다면 현실적 괴리가 생기기 쉽다. 빅데이터나 AI를 사용하는 많은 콘텐츠에 대한 피로감이 벌써부터 생겼다면, 아마 이것이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보인다. AI의 기술을 실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AI를 대중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AI를 대중에게 설명하는 사람은 AI를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으로 (추상적으로) 보는 편이 대부분이다.


빵은 제빵사가 굽고, 회는 생선가게에서 뜨듯이 당연한 분업의 현상이고,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위 AI라는 분야는 조금 다르다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붕어빵을 만들거나 생선 샌드위치를 파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 그런지 설명하려면 지금까지의 인터넷을 보면 된다. AI가 우리 인생과 삶에 끼칠 영향을 예측하려면 인터넷이 좋은 예시가 된다.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상상 이상으로 바꾸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접하는 정보와 우리의 감정적 반응까지 조성하고 있다. 플랫폼에서 좋아요 기능을 사용하면 인기의 편한 척도가 되지만 자극적 콘텐츠를 늘리는 역할 또한 하게 된다. 한국의 대표적 플랫폼들은 세상 최고에 속하는 공학 재원들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악성 댓글에 대한 반응으로 댓글창을 없애는 대응을 택하게 된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나 개선책이 매우 어렵거나 비싸다는 뜻이다.


인터넷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만 우리가 가진 최고의 병사들도 인터넛을 길들이지 못한다. (제어하는 방법은 있지만 그건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기술이 우리를 도우면서도 우리보다 강한 것이다.


AI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을 침투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설레는 방법이지만 우리의 모든 합친 노력과 재력으로도 단점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점들이 있는지 알아채고 정의하는 노력 조차 지속적으로 굼뜰 것이다.


우리가 길들이지 못하는 인터넷의 역효과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는 굳이 여기서 나열하지 않아도 다들 느끼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현재의 인터넷 서비스들은 AI에 (엄밀히 말하면 알고리즘과 기계학습에) 기반한다. 인터넷을 길들이려면 AI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인터넷 속에서 밀집한 사람들 (우리들)의 행동 양상과 본능 또한 이해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상호 작용을 합친 것이 소위 AI의 미래이다.


연구원인 내 입장에서 제안을 하자면, 대학이나 기업의 관련 연구 과제들이 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AI라는 것과 인간(이 온라인에서 이루는 사회 기제) 사이의 상호 작용을 전문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일자리를 만들어서 줘야 한다. 두 번째는 이러한 연구의 목표와 결과를 대중에게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적 작용의 악역향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면 AI만 건드린다고 될까? 손뼉도 서로 만나야 소리가 나니 말이다. 이것을 과학 커뮤니케이션 (science communication)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관련 연구계획에 참여했을 때 알게 된 것이 있다. 국가와 재단에서는 명목 상으로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이제는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건 매우 긍정적이다. 이걸 제대로 고려해야 예산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런 부분을 참여 교수들에게 피력하자 반응이 미지근했다. 연구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아예 비과학자들에게 아웃소싱을 해서 신경을 쓰지 않고 싶어 했다.


대중과의 소통보다 연구의 성과가 우선인 것은 백 퍼센트 맞다. 하지만 나는 좀 골똘해지던 순간이었다. 그러면 이 중요한 역할을 누가 해야 하지?라고. 기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이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대중 (일반 사람들)에게 가는 영향은 제대로 개선될까?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본 경험은 독일 대학 즉 독일 공대의 일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오늘 짧게 발췌, 번역할 기사는 독일에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으로 유명한 기자인 Ranga Yogeshwar의 인터뷰이다. 코로나 방역 반대 운동이 독일에서도 소량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역학을 보면서 느낀 점을 주로 얘기했고, 내가 위에 말한 내용과 연결되는 의미가 많다. 아마 인도 출신 이민자인 것 같은데 사족을 곁들이자면 같은 조기 이민자로서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명확해 보이는 영역 사이의 틈새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중 문화에서 자란 이주민 자녀들이다. 그래서 이런 융합적 일에 평생 단련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건 사족일 뿐이다.


과학과 사회는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하려 할 때마다 충돌한다. 이 교집합에서 일하고 사고하는 사람 중에 과학 저널리스트 Ranga Yogeshwar가 있다.


Q: 미디어가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손해 보기 전에는 사람들이 위험을 잘 못 느끼나요?

A: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예방접종을 안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눈으로 보았어요. 마비된 중풍병자들을 보면 질문은 아주 단순해졌죠. 저렇게 살래, 주사 맞을래? 오늘 현대 사회에서는 예방접종이 가능한 병마와 싸우는 광경이 드물죠. 그러면 사람들은 위험이 사라졌다고 착각해요. 그래서 예방접종 불신자들이 생기는 거예요. 개인적인 경험은 특별하고도 설명 불가한 힘을 지녀요. 우리가 요즘은 광고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미디어도 신뢰를 잃었어요. 우리는 더 약아졌고 남이 보여주는 것을 잘 믿지 않아요. 하지만 이로써 사실적인 팩트까지 무능하게 튕겨 나가게 돼요.


Q: 큰 불확실성을 견뎌낼 수 있기 위해 우리 사회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A: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한 소통은 어려운 묘수라서 이를 앞서 자처하는 정치인은 없어요. 의심을 허용하는 문화가 우리에게 아직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좋은 논쟁으로 설득되는 소통의 문화를 개인적으로 소망합니다. 주장을 바꾸어도 체면을 잃지 않고 그저 지평을 넓히는 것이 가능하다면 참 좋겠죠.


Q: 최근에는 국가의 독일 연구재단(DFG)이 논란되는 코미디언의 풍자를 SNS에 올렸다가 비판을 받고 내렸다가, 생각의 자유를 막는다는 새로운 비판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 올렸죠. 이런 사건이 과학과 대중 사이의 소통 문제를 보여줍니까?

A: 수백억의 국가 예산을 나눠주는 단체에서 소통 전문 부서 직원을 두어 명만 갖고 있다면 큰 의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에게 명확히 요구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소형 원심 분리기를 위한 지출보다 이제는 소통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야 해요. 소통은 문화뿐 아니라 과학의 필수 요소가 되었어요. 연구의 상당 부분이 세금으로 지원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시민의 권리 때문이기도 해요. 사물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과학과 동등하게 대화를 나눌 권리 말이죠.


Q: 요즘 코로나 때문에 관련 분야의 과학자들이 이중으로 활동하는 양상이 눈에 띄어요.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팟캐스트도 운영하는 식이죠. 이로 인해 과학이 더 이해하기 쉬워지나요?

A: 멋진 발전이지만 절대 쉬워지지 않습니다. 과학은 종종 특정 대상을 향하고 위한 공감이 부족해요. 대중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많은 과학자들이 몰라요.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도 본능과 감정이 있어요. 그것을 진지하게 봐주어야 해요. 모두가 자연과학자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해야 하고요.


Q: 사회가 과학지식을 배워야 하나요, 과학이 소통을 배워야 하나요?

A: 과학이 소통의 기술을 습득해야 해요. 사회를 더 유식하게 만드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지금의 세상은 몹시 복잡해서 사실상 모든 문제들이 무척 어려워요. 코로나도, 기후변화도 그렇죠. 모두가 이해할 때까지 집중 과외를 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요. 다른 방식의 연결고리가 필요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불신 대신에 신뢰를 만드는 작업이에요.


Q: 신뢰를 어떻게 만드나요?

A: 신뢰는 진심과 관련이 있어요. 아무것도 판매하려 하지 않는 정직함인 셈이죠. 이걸 한 번이 아니라 자주 보여주면 신뢰가 형성돼요. 과학이 신앙 교리가 아니라 깨달음의 역동적 과정이라는 사실과, 이 과정에서 지식이 엄연히 변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배워간다면 도움이 되겠죠.


AI와 빅데이터에 대한 담론의 증가를 보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들이 많다. 내 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확히 무엇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신뢰가 생긴다. 작은 제안을 하자면, 설명하는 사람에게 기술적(실무적) 이해가 조금은 있어야 경각심을 잘 구분해서 알려줄 수 있다. 그런 내용을 잘 찾아서 좋은 지식을 늘리면 좋을 것 같다.


이상, 독일 대학에서 AI+사회 연구 분야에 종사하는 한 인력의 짧은 감상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은 정이 없을까? (쉬어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