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세계

기록의 세계

by 한량

엄마는 내가 몇 년 전 줬던 셀카봉을 아직 소중하게 쓰고 있다. 요즘 나오는 셀카봉에 비해 투박한 그것을 엄마는 가방 한편에 삐죽하니 꽂고 다녔다. 그러다 멋진 풍경을 보면 꺼내 척척 편 다음 풍경과 엄마의 얼굴을 함께 담곤 했다. 동행 없이 가우디 투어에 가서도 셀카봉 덕에 멋진 사진을 많이 찍었다며 좋아했다. 꼬마도 꼬마 나름의 분명한 관점觀點이 있다. 길을 가다 ‘멋지다.’ 란 생각이 들면 카메라를 달라고 한다. 똑딱이 필름 카메라를 쥐어주면 뷰 파인더로 상을 확인하고는 찰칵! 소리를 낸다. 여기서 소리란 꼬마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아직 촬영의 원리는 모른다. 언젠가 실수로 전원이 켜지고 줌렌즈가 위잉하고 나오자 당황한 꼬마는 외쳤다. ‘들어가! 들어가!’ 라고. 발 밑으로 비둘기가 다가올 때 ‘저리 가!’ 외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벼운 소재의 슬링백이 늘 축 처져있다. 꼬마의 손에 넘어간 필름 카메라를 제외하고도 뭔가를 찍고 담는 장치가 3개나 된다. 필름카메라 렌즈와 디지털카메라 바디를 호환한 카메라a, 영상을 담기 위한 소형 짐벌 카메라b, 그리고 핸드폰까지. 가방 끈에 어깨가 쓸릴 만했다. 카메라a의 경우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오르는 필름값에 대한 대안으로 시도해 보았다. 옛날엔 가방 가득 필름을 담아 떠나곤 했는데 이젠 너무 럭셔리한 취미가 되어버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던 기댓값이 너무 비싸진 셈이다.


카메라a는 미놀타 필름카메라 렌즈에 소니 디지털카메라 바디를 결합한 것이다. 사용법은 일반적인 디카와 같다. 충전을 마친 후 메모리 카드를 잘 끼워 넣는다. 화면으로 상을 확인한 후 셔터를 누른다. 찍힌 사진은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계속해서 여러 번 찍을 수도 있다. 100번 찍고 싶으면 100번 찍어도 된다. 이 단순한 진리가 처음엔 몹시 신기했다. 필름사진 찍으면서는 감히 이런 사치를 누려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렌즈를 통해 얻는 결과물에선 필름사진 느낌이 물씬 난다. 신기한 일이다. 카메라의 핵심은 역시 렌즈인 걸까. 그렇듯 렌즈는 비싸지만 바디는 싸다. 혹시 바디가 고장나더라도 이는 2000년대 이후의 산물이니만큼 대체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바디가 디카이니 유지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배터리 충전하는 전기값 정도 드니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필름과 비교할 수 없다.


카메라b는 작은 짐벌 카메라다. 딱풀 정도로 크기가 매우 작아서 한 손에 쥐고 다니기 좋다. 작은 카메라의 장점은 위화감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들고 다니며 자연스러운 장면을 찍기 좋았다. 짐벌 기능도 훌륭해 움직이며 찍었음에도 흔들림이 적었다. 이 카메라를 굳이 들고 간 이유는


유튜브를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세상에 유튜브라니. 여행을 한참 앞두고서 아직 비행기표는 고사하고 일정과 예산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나는 친구에게 큰소리를 쳤다. '나 언젠가 아주 길게 바르셀로나 갈 거야. 거긴 날씨가 정말 좋으니까 막 옷도 적게 입고 다닐 거고, 우리 꼬마 모습도 찍어서 유튜브에 올릴 거야.' 조금 마신 낮술 덕에 내 장래희망도 과감해졌다. 친구가 말했다. ‘음, 옷 적게 입고 나오는 거랑, 아기들 나오는 영상들은 블라인드 될 확률이 높은데? 둘 다 각각 위험해!’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카메라b를 사고 조작법을 익힌 뒤, 영상편집 프로그램 사용도 연습했다. 처음엔 당연히 낯설었지만 하다 보니 차차 익숙해졌다. 그래서 정말이지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일상을 차례로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니, 여행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부지런해요?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나는 몰두했다. 영상을 찍어두고 집에 와 파일을 옮겨 정리한다. 편집 프로그램에 띄워놓고 앞뒤로 옮겨가며 주제를 다듬어간다. 길이도 조절하고 자막도 넣고 음악도 넣는다. 그리고 각주를 달아 업로드. 이 바쁘고 복잡한 과정이 참 즐거웠다. 영상을 만들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아, 이게 결국 매체만 달라질 뿐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구나. 글로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만들거나,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냐는 거네. 아직 편집 기술이 서툰 관계로 나의 여행기는 어딘가 초등학생 일기장 같았지만-오늘도 참 재미있었다!-새로운 도전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사실 영상 편집은 같거나 비슷한 영상을 계속 돌려봐야 한다. 그게 꼬마의 영상이라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상 속 꼬마의 웃음, 울음, 말재간, 춤, 재롱, 떼쓰기 등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비실비실 흘렀다. 아, 이게 덕질이라는 건가? 하루 종일 씨름하다 애 재우고 나면, 그날 찍은 애 사진 들여다보던 밤들이 생각났다. 반짝하고 깨달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 내내 내 손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빴다. 어떤 순간을 만날 때마다 가방 안에서 카메라들이 계속 들락날락하는 셈이다. 똑같은 모습을 이걸로도 찍고 저걸로도 찍고 다시 이걸로도 찍는다. 때론 아, 이런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으나 사실 지나고 나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남는 건 사진이야, 그리고 영상이야.’ 이런 생각.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걸까? 셀카봉을 꺼내 드는 엄마도, 셔터도 누를 줄 모르지만 찰칵! 촬영에 임하는 꼬마도, 그리고 쉴 새 없이 바쁘게 뭔가를 찍고 있는 나도. 기록의 수단이 여의치 않았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했을까? 눈 앞의 장면이 흘러감을 아쉬워하는 건, 결국 유한함에 대한 아쉬움일까? 지금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꺼내 들어도 흐르는 강물 위 뱃전에 새긴 칼자국처럼 결국은 다 흐려지겠지. 그렇지만 역시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 오늘도 무겁게 카메라를 들고 나서고, 내 앞의 장면들을 담아보려 애를 쓴다. ‘엄마 봐봐, 여기!’ 꼬마에게 말을 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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