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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27. 2022

#17 농땡이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연예인은 그중에도 특히 가수는 그의 히트곡 이름처럼 살기 마련이라고 어딘가에서 들었다. 농담 같은 그 말은 내 머리에 콕 박혀있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자 싹을 틔웠다. 그렇다면 나는 글 쓸 때의 이름을 '한량' 이라고 정할래.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 정말이지 그렇게 인생을 보내고 싶으니까.


거기엔 인생을 보내고 싶다기보다 인생을 보내버리고 싶다는 느낌도 설핏 숨어있었다. 그 무렵 나는 수동적인 죽음을 동경하기도 했으니까. 이를테면 출근길의 도로 위, 과실 0으로 맞이하는 사고 같은 거. 정신을 잃어버리고 구급차가 달려오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소 하고 뻗어버리는 상황. 주목할 지점은 과실 0이라는 데에 있다. 많은 것에 과부하가 걸려있었으므로 나는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연속되는 삶에서 포즈, 혹은 스탑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며.


'와! 이름이 한량이래. 이름 참 재미있어요.' 북페어 같은 곳에서 이런 속삭임들을 마주할 때 나는 따라 웃곤 했다. 그래,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그리 살리라. 살리라. 살어리랏다, 하며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어딘가 뒤죽박죽, 쉬는 것 같기도 하고 노는 것 같기도 하면서 물 아래선 엄청나게 발길질을 하는 삶. 라 가리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민아 언니에게 손 흔들며 헤어질 때만 해도 잠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여행 중이니까 언니와 약속한 글들을 곧 다시 써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래서 농 반 진 반으로 언니에게 다음 주제는 '농땡이' 라고도 전했다. 언니! 농땡이예요. 농땡이, 알았죠?


이건 나의 히트곡이었을까.


일부러 피우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었건만, 농땡이를 피우게 되었다. 후우-

주절주절 부끄러운 변명을 하자면, 어째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더 많이 바빠졌다. 시작은 인천공항에서부터였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와 시차, 그리고 꼬마의 수발 때문에 굼뜨게 움직이는 나와 달리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이들은 엄청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무빙워크 위에서도 앞만 보고 경보하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가니 방역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기내에서 종이 안 받으셨어요?' 방역복을 입은 남자가 물었다. '아, 세관신고서만 주던데요.' '그럼 저기 가서 작성하시고 제출하세요.' 하여 쭈뼛거리며 테이블을 찾고 있노라니 다른 이들은 이미 큐알코드를 찍고 줄을 빠져나가고 있다. 아, 아마도 미리 작성해서 제출할 수 있는 건가 보다. 하며 수기로 써나가고 있자니 공항 직원이 슬쩍 말을 흘린다. '큐알로 해 오시면 더 빨리 연락 가는데.' 아, 네네. 하고 종이를 내고 나와 엄마, 꼬마도 라인을 벗어난다.


휴.


스페인과 한국은 다른 행성,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빠르고 정확하고 신속하고 매끄럽다. 그러면서 무례하다. 한 달 동안 마스크 없는 세상에서 살다 오니 코도 입도 갑갑한 느낌이 든다. 정말이지 우주를 거슬러 도착한 느낌이었다.


귀국 후 pcr 검사부터 시작해 며칠에 걸려 짐을 정리하며 시차와 중력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꼬마는 오랜만에 간 어린이집에서 한 시간 만에 집에 돌아가겠다고 떼를 부렸다. 그러니까 너도 휴가 마치고 출근하는 마음이었던 걸까? 연착륙을 시도하는 과정 속에서 할머니의 상이 있었고, 그렇게 부랴부랴 장례식장도 다녀왔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여름에도 멀쩡하던 꼬마의 어린이집에서 수족구가 돌았다. 그리고 꼬마도 당첨. 고열과 함께 손과 발, 입에 수포가 돋아 이름도 '수족구' 인 이 병은 법정 전염병이 될 만큼 독하고 무서운 놈이었다. 일단 전염력이 무지하게 강할뿐더러 구내염 때문에 뭘 먹기 힘들어한다. 그러니 짜증도 떼도 늘고 자다가도 괴로워 일어나 울곤 했다. 더불어 완치 판정서를 받기 전까진 당연히 등원도 못 하므로 나는 수족구인과 종일 붙어있어야 했다. 검색을 해 보니 열이 떨어지고 수포가 가라앉으면 전염력도 약해지는데, 그 이후 환부의 껍질이 벗겨진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손톱과 발톱이 빠지는 아이들도 많다고. 이거 참 기절할 노릇이었다.


조심스레 꼬마의 상태를 살피며 간호 겸 수발을 드는 동안 나는 나대로 할 일들이 있었다. 글을 마무리하는 것, 유튜브 작업을 이어가는 것, 인터뷰 한 건, 원고 기고 한 건, 그리고 팟캐스트 출연 한 건. 동시에 많은 일이 몰려와 나는 행복하기도 또 조바심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농땡이? 잊지 말자, 농땡이. 귀국 며칠 만에 한국 스피드를 다 따라잡았다. 고국? 그래, 이게 나의 고국이지. 동전 넣고 버튼 누르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나는 기계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써 나갔다. 꼬마의 낮잠과 밤잠 사이를 그렇게 쪼개 썼다. 유튜브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도저히 짬이 안 나서다. 인터뷰는 마음을 담아 쓰고자 노력했다. 인터뷰 질문에도 '한량' 필명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조금 웃었다. 팟캐스트는 몹시 재미있었다. 중요 키워드 중심으로 말할 거리들을 조금 준비해 갔고, 그걸 거의 다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지난번보다 훨씬 힘을 빼고 즐겁게 녹음한 느낌이었다. 원고 청탁 건은 두다다다 두다다다 써서 보냈더니, 몇 단락이 잘린 피드백이 돌아왔다. 그때 조금 정신을 차렸다. 잘린 부분은 너무 원색적인 느낌이라 쓰면서도 괜찮을까? 생각했던 지점이었다. 아직 다 희석되지 못한 분노 같은 게 정제되지 않고 글 속에 스며있었다. 아, 잘리길 잘 했네. 하며 잘라내고도 주제가 이어질 수 있게끔 다시 써서 보냈다. 아니! 제 글에 칼을 대다뇨, 같은 자존심은 전혀 없다. 클라이언트의 정중한 요청에 칼 같이 대응하는 것이 청탁에 대응하는 나의 자세다. 이번엔 바로 오케이가 났다. 좋아.


이번엔 나도 오케이 사인을 줄 때다. 오랜만에 인디자인을 켜 봤다가 다시 일정표를 봤다가 머리를 싸맸다. 아, 이거 진짜 못하겠는데. 아직 인터뷰와 원고가 남은 때이기도 했다. 아무리 코리안이어도 이건 좀 과하다 싶어 전문가의 손을 빌리기로 한다. 마무리한 글과 사진을 넘기고, 디자인 시안을 받기로 한다. 홀가분한 게 아니라 이제 시간을 좀 번 느낌이었다.


딸기맛 감기약과 다르게 수족구 약은 맛이 없는 모양이었다. 뽀로로 비타민의 약발도 다 떨어지고 먹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꼬마에게 약을 먹어야 다 낫는다고 설득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수포는 아주 심하지 않은 선에서 잦아들었다. 밥은 잘 안 먹으려 들기에 요거트, 요구르트, 포도 같은 차갑고 달콤한 것들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손을 내젓는 너는 무슨 주상전하라도 되는 거니. 아프니까 봐준다. 하면서도 나도 육체를 가진 인간인지라 게다가 짧은 인내심을 가진 인간에다가 무척이나 계획적인 인간인만큼 시간을 어디에서 빼내어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법칙은 정직하다. 스페인이든 한국이든 지구가 해를 한 바퀴 돌고 나면 하루가 간다. 날짜는 꼬박꼬박 깎여나가는 사이, 미룬다고 모른 척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그저 묵묵히 오늘치 글을 쓰고, '메일 드렸습니다!' 같은 깍듯한 문자를 보내고, 내지의 레이아웃을 의논하고, 하루 세 번의 약을 먹이는 사이 모든 마감이 끝났다. 수족구도 끝났다. 열 손톱과 열 발톱은 무사했다. 그리고 나의 일곱 번째 책도 완성되었다. 이게, 과연 최선의 농땡이었을까. 마감 약속을 못 지켜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다음엔 제대로 한 번 농땡이 피우겠다고 맹세해 본다.


더불어 여기서 갑자기 마이크 들고 목소리  바꿔 인사드리겠습니다. 저의 일곱 번째 에세이는 <Barcelona 27 dias> 입니다. 이번 여름 바르셀로나에 보낸 27일간의 여정을 247 페이지에 담았습니다. 부제는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입니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도시를 생각하며 조금  여행을 준비하고, 무사히 돌아오기까지의 마음을  내려갔습니다. 흘러가는 생각이 글이 되고 다시 물성을 지닌 책에 이르기까지, 다듬고 매만지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즐겁죠.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벌써 추억이 되어가는 지난날들을 그리워하며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11 11일부터 13일까지 홍대 무신사 테라스에서 열리는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 2022' 에서  선을 보일 예정입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께선 놀러와서 직접 살펴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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