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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용할 양식. 아침나절 달이 사 온 크로아상을 먹는다. 과일과 오렌지 주스도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오른다. 부엌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중정은 조용하다. 가끔 새들만 날아간다. 둘러선 다른 건물의 테라스에서 누군가 빨래를 넌다. 우리도 창 바로 밑에 걸린 빨랫줄에 우리의 빨래들을 널기로 한다. 엘리가 꺼내준 바구니엔 집게가 한가득이라 아낌없이 넉넉히 널 수 있다. 그러다 옆 건물 일층에서 길게 뺀 처마를 본다. 그 위엔 빨래집게들이 여럿 떨어져 있다. 알록달록한 실수들. 귀여워서 웃다가 행여 같은 실수를 할까 싶어 조심조심 집게를 꽂는다. 쨍쨍한 볕에 빨래를 말리는 것. 그리고 잘 마른 빨래에 스민 햇볕 냄새를 맡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다. 공기가 좋은 이 도시에서 마음껏 부릴 수 있는 호사다.
게으름을 부리며 오늘은 무엇을 할까 의논한다. 구글맵을 켜놓고, 우리가 찍어놓은 별표들을 들여다본다. 날씨예보를 확인하고, 동선을 가늠해 본다. 대부분의 날이 맑았으므로 우리는 그저 씩씩하게 걷기만 하면 되었다.
버스는 산길을 따라 한참 올랐다. 고갯길을 돌고 또 돌고. 커다란 아파트도 지나고 작은 상점들도 지나니 건물보다 숲의 밀도가 높아졌다. 이제 내릴 곳이 가까웠다.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버스에서 내렸다. 구엘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엔 티켓부스가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그때도 입장료를 냈었나 싶었다. 그냥 개방된 공원이었던 것 같은데, 눈 앞에 부스가 떡하니 있으니 내 기억을 마냥 믿기 어렵다. 게다가 티켓은 시간 단위로 지정된 인원수만큼 파는데, 지금 살 수 있는 티켓은 늦은 오후에나 입장 가능한 표다. 미리 알아보지 않고 해맑게 온 죄다. 지금 표를 사두고 나중에 다시 와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데 사람들이 그냥 공원으로 향하고 있다. 일단 우리도 그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냥 무사히 통과한다. 표를 내미는 이도 없고, 보자는 이도 없다. 의구심을 달고 우리도 공원에 들어선다.
알고 보니, 공원의 일부분은 티켓으로 입장 가능한 곳이고 나머지 부분은 개방된 곳이다. 산길을 한참 오르다 그걸 알았다. 이 길은 그냥 등산로잖아? 우리는 높낮이 다른 경사로에서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했다. 북한산 지척 아니 북한산 그늘 아래 살지만 정작 산에 오른 것은 서너 번. 등산에는 별 소질도 취미도 없는 나는 필사적으로 방향을 찾기 시작한다. 갈림길의 표지판을 열심히 들여다보다 결국 목적지를 찾아낸다. 티켓을 사지 않은 자가 티켓을 산 이들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길. 자본주의의 끄트머리에서 꼴딱꼴딱 애를 쓰고 나니, 이윽고 우리가 기억하는 구엘 공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도마뱀 계단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 위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 아래를 내려다보니 공사가 한창이다. 광장의 반은 펜스로 막아 들어가지 못한다. 곧 다가올 성수기 시즌을 대비하는 듯 싶었다. 티켓 안 사길 잘 했네. 우리는 가난한 미소를 흘린다.
음악 소리가 울리는 곳을 찾으니 마침 적당한 벤치가 있다. 물로 목을 축이며 연주를 듣는다. 처음 보는 악기가 둘이다. 무릎 위에 올린 악기는 손바닥으로 리듬을 만들고, 긴 나무로 만든 악기는 굵은 울림을 낸다. 전기 없는 일렉트로닉 같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두어 번 바뀔 무렵까지 자리를 지켰다. 앉은 자리가 편안하고 음악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주머니를 털어 팁을 주고 일어나 또 다른 앉을 곳을 찾는다. 꼬마 둘이 흙놀이를 하는 놀이터로 자리를 옮긴다. 달의 무릎을 베고 누우니 잠이 오려고 한다. 뒷목,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부분을 쓰다듬어주면 특히 그렇다. 거기에 잠을 부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 나를 일으킨 것은 배고픔. 가볍게 먹은 아침에 비해, 계획 없는 등산으로 많은 열량을 소비했다. 다행히 공원 아래로 향하는 길은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다. 걸어서 그라시아 거리까지 갈 수 있겠다 싶어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며 걷는데,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살짝 어지럽기도 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저혈당 증세. 다행히 마주친 슈퍼에서 초콜렛 음료를 산다. 길가의 벤치에 앉아 연달아 마신다. 발 밑으로 다가오는 비둘기를 쫓을 힘도 생겼다. 급조한 에너지로 무사히 지하철을 탄다.
별 기대 없이 들어선 가게에서 정말 맛있는 식사를 한다. 에피타이저에서 이미 맛집의 기운을 감지한다. 구운 가지와 콜리플라워, 그리고 오이와 토마토, 양파를 섞은 샐러드. 맛은 담백하고 솔직하다. 이국적인 건강식의 매력. 이윽고 주문한 샥슈카가 나왔다. 납작한 팬엔 걸쭉한 토마토 소스와 반숙 계란이 자글자글 끓는다. 피타 빵을 쭉쭉 찢어 발라먹으니, 고국이 멀지 않다. 한국 음식처럼 매운맛은 아닌데, 이상하게 김치찌개 맛집에 온 느낌이다. 유난히 아니 유일하게 애국적인 나의 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 여기에 다시 오자, 다 먹기도 전에 다짐하고 만다. 부른 배를 안고 집 앞 까페에서 한국인의 음료,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잔 마신다. 예쁘게 찍으라며 커피 바 위를 훔쳐주는 직원 덕에 웃는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것. 점점 여행의 모토가 단순해진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싸우지 않는 것.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위해 이곳에 왔다. 입 안의 중동 음식이 샬롬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