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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럭으로 깔끔하게 구획된 바르셀로나를 위에서 들여다보면, 곳곳에 푸른 영역이 있다. 크고 작은 공원들이 즐비한 도시. 구글맵으로 보고 있노라면, 공원과 공원 사이를 한 발 뛰기로 건너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연두색 보도블럭만 밟기 놀이처럼. 미로 공원을 나서 맥주공장까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날인지, 여간해서 쉽게 가기 어렵다. 골목골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눈과 발을 붙잡는다.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리니, 도로를 막아놓고 행사가 한바탕이다. 무대 위에는 에너지 넘치는 분들이 음악에 맞춰 댄스를 선보이고, 그 앞에는 동작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어른들부터 꼬마들까지, 팔을 접었다 펴고 다리를 구르며 박자를 맞춘다. 무대 옆, 작은 입간판에는 줌바댄스라 쓰여있다. 우리는 엉겁결에 그 속에 들어가 어설프게 흉내를 낸다. 너 이래도 가만히 서 있을래? 식으로 몰아붙이는 음악 덕분이다. 한 곡이 끝나자 모두가 박수를 친다. 우리도 박수를 치며 살금살금 대열을 빠져나온다. 멋쩍은 웃음 지으며 다시 공장을 향해 걷는다. 그러다 만난 광장엔 또 다른 축제가 열리고 있다.
우리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은 길가의 맥주 가판대였다. 자석에 이끌리 듯 다가가 돈을 내는 우리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돈을 줄 테니 맥주를 주세요. 그러니까 지금 맥주를 마시러 가는 길에, 길에서 맥주를 사 먹는 거다. 돈을 내니 작은 컵을 준다. 컵에는 이곳, 산 안토니 시장의 50주년 기념행사라 쓰여있다. 그 컵을 들고 옆 칸으로 가 생맥주 한 잔을 받는다. 잠시 목을 축이며 돌아보니, 커다란 천막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다. 광장엔 작고 귀여운 나무 의자들이 흩어져 있어, 우리는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끌어다 앉는다. 4분의 4박자의 경쾌한 음악이 광장을 메운다. 무대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불러모으더니 갑자기 댄스 교습이 시작된다. 이번엔 사교댄스다. 우노 도스 뜨레스 꽈뜨로, 귀에 익은 네 단어로 사람들의 발을 손쉽게 척척 움직인다. 자, 이제 둘씩 짝을 지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세요. 까딸란을 몰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수 있다.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방금 배운 발동작을 하고 있으니. 길 가던 이들이 잠시 서서 그 풍경을 지켜보다,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의 어깨를 잡는다. 반쯤 남은 맥주잔을 들고 우리는 걸음을 옮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종착지를.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었나. 오늘은 예외다. 악재 대신 축제가 줄을 잇는다. 맹세코 계획한 동선이 아님에도, 다음 골목 또 다음 골목에서 다른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이번엔 퍼커션 밴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굉음과 함께 전진한다. 제일 앞에 선 분의 지휘에 맞추어 무섭도록 절도있는 박자를 선 보인다. 언어 이전의 리듬. 언어 너머의 소란. 설렘과 진지함이 섞인 표정들을 구경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로 나선다. 이젠 정말 때가 되었다.
드디어 도착한 모리츠 맥주공장. 커다란 홀엔 주말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서버들은 그 많은 테이블 사이를 나비처럼 난다. 잔들로 가득 찬 쟁반을 가볍게 이고 나르는데, 낭비하는 동작 하나 없이 경쾌하다. 잠시 빼앗긴 눈길을 거둔 후, 메뉴판을 정독한다. 매 끼니 제일 설레는 시간이다. 이윽고 우리의 맥주도 도착한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건배를 하고 들이킨다. 맛이 없을 리 없다. 두 잔째 맥주를 마실 무렵, 우리는 테이블 가운데 팔을 뻗어 서로의 손을 잡는다. 호안 미로 공원에서 본 풍경을 되짚으며 어떤 장면을 상상한다. 공원과 마주한 작은 집. 테라스엔 갖가지 화분들이 즐비하다. 우리 거기에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본다. 걷기 시작한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힘차게 뛰어논다. 멀리서 날아온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들의 함박웃음을 보는 것. 아이 낳기에 대해 몹시 비관적인 내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이 깃든다. 희망이 깃듦을 반색하고 싶지 않아 굳은 표정을 내보이지만, 그게 다 숨겨질 리 없다. 적어도 달은 그걸 다 알아차릴 수 있다. 만난 지 8년째. 시간이 우리를 그만큼 도타웁게 만들었다. 이것은 내 방식의 사랑 표현이다. 한참을 지나 그 순간을 복기하며 기록하는 것. 문장 사이에 감정들을 알뜰히 끼워두는 것. 나는 그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