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한 글자 (9)
이곳은 청담동. 홀로 호텔에서 자는 밤이다. 체크인을 마치고서 새하얀 침대보를 마주하니 새삼 호텔에 왔음이 실감난다. 긴 소파와 작은 책상. 반듯하게 각 잡힌 이불과 가지런한 4개의 베개. 그 위에 조심스레 누워본다. 늦잠도 조식도 없이 이른 아침이면 출근을 서둘러야 할 테지만, 나쁘지 않다. 사실 아주 많이 좋다.
넷플릭스는 없으나 클래식 채널은 있다. 그걸 틀어두고 가져온 책을 편다. 오늘의 책은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영국 남부의 해안가를 따라 걸으며 쓴 에세이다. 한 번에 모든 코스를 걷는 대신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이어 걷는 방식이다. 그의 남편과 40개월짜리 아들은 일정의 부분을 함께 한다. 하루 목표치의 중간쯤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먹고 미리 저녁에 묵을 숙소에 가 있는 방식이다. 하필 겨울에 시작한 터라 날씨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옷은 젖고 바람은 세차다. 자주 길을 헤매고 그럴 때마다 휴대전화의 전파는 터지지 않는다. 보송한 새 옷, 따뜻한 저녁을 갈망하는 만큼 저자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한다. 어쩐지 자신에게만 유난히 어려웠던 일들에 대해서도.
나는 왜 남들과 다른 걸까? 남들이 별스럽지 않게 해내는 일들이 내게는 왜 그다지도 힘들게 다가오는 걸까? 의문들은 육아란 과업 속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다. 그 마음 알지, 알지. 비바람에 맞서 해안가 자갈길을 걷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길, 어렴풋하게 보이는 저편, 등 뒤론 불태워버린 다리. 이런 이미지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일. 저지른 선택에 엄중한 책임을 지녀야 하는 일. 아마도 눈 감을 때까지 놓을 수 없는 일. 혼자서 혹은 둘이서 지내던 일상과 셋이서 꾸리는 삶은 차원이 다르다. '무자식 상팔자'란 말은 분명 '유자식'자가 만들어 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이 호캉스는 귀하다. 아무런 약속도 만남도 없이 한들한들 저녁 무렵의 도산대로를 걷는다. 무척이나 어른답게 복국 한 그릇을 훌훌 비우고, 커피 한 잔 들고 공원을 돈다. 일요일 저녁, 불 꺼진 외제차 전시장과 24시간 연중무휴의 식당들, 후미진 곳의 룸살롱을 지나 어슬렁거린다. 걸으면서도 생각한다. 집에 관해서. 골똘하고 집요하게 생각한다.
조금 먼 곳으로의 이사. 물설고 낯설은 곳에서 보낼 긴 시간. 그동안 우리는 이곳 집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일단 이사가 확정되고 나니 우리 앞엔 백지가 펼쳐졌다. 앞으로 살 곳에 대한 상상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지금 우리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손으로 서너 개의 공을 던지고 받는 듯한 일상 속에서 논의는 띄엄띄엄 이어졌다. 선택지는 셋이었다. 집을 판다. 전세를 준다. 월세를 준다. 전세를 준다면 선순위로 잡힌 주택담보대출을 보고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특약으로 대출상환을 한다면 세입자를 구할 수 있겠으나 그럼 남는 금액이 애매해졌다. 월세를 준다면 매월 현금은 확보되겠으나 어쩐지 야금야금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이자며 원금 상환에 치이는 터라 잠시 넉넉해진 느낌에 취해 씀씀이만 더 커질 수 있었다. 그럼 집을 팔까? 판다면 얼마에?
생각이 그리 이어진 걸 보면 어쩐지 쓸쓸하다. 3여 년을 살았지만 집을 판다고 가정했을 때 밀려드는 서러움은 적었으니. 대신 요즘 거래가 어떠한지 찾아보았다. 아파트라는 상품이 지닌 규격성과 환금성을 확인하는 시점이었다. 거래가 많진 않았으나 가격은 하한가를 찍고 서서히 오르는 중이었다. 실제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해 동네 부동산에 들러보았다. 꼬마가 정수기와 프린트기에 관심을 보이는 사이 대화는 민첩하게 이뤄졌다. '왜? 집 내놓으려고?' '아,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해서요.' 이 집을 거래했던 부동산 사장님은 최근 거래 양상과 금액에 대해 이야기했다. 같은 단지 내에서 평수를 넓혀 가는 거면 자기가 알아봐 주겠다고도 했다. 일단 그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꼬마의 집중력도 거기까지였다.
집 사진을 찍자. 우리의 결론은 그렇게 났다. 부동산 매물사이트에 실제 사는 집의 사진은 개인 정보 때문인지 잘 올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끔 올라오는 사진들은 입주 초기에 찍은 텅 빈 공간뿐이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가구가 있어 공간의 규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적당한 생활감이 깃든 사진. 그러나 엄청나게 예쁜 사진. 직접 방문해 둘러보고 싶은 사진. 내가 그곳에 산다면? 하고 미리 상상하게 만드는 사진. 그리고 사진을 곁들여 글을 쓰고 싶었다. 집의 장점을 어필하고 동네를 소개하자. 실제 살아봐야 아는 이야기들을 쓰자. 익숙한 감각이 꿈틀거렸다. 순간 나는 매도자가 아니라 호스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