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질페스토의 고향을 찾아서
뜨거운 볕, 후끈한 공기. 몇 블럭 걷는 사이 끈끈한 땀이 배어 나온다. 그럴 땐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는 수밖에 없다. 넉넉한 폭의 주랑이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낌없이 쓴 대리석 바닥 위를 사뿐사뿐 걸을 수 있을 텐데. 그러기에 제노바 도심은 많이 복작거린다. 골목엔 오토바이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고, 차들은 잽싸게 도로를 달린다. 그리고 우린 항구를 향해 터덜터덜 걷는다. 그러다 콜럼버스의 집도 만난다. 지중해 항구 도시 곳곳마다 흔적들을 야무지게 남긴 사람. 나는 자연스레 (또!) 대항해시대 게임을 떠올리고, 제노바의 특산품이 갑주였나? 하고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면서 광장의 분수와, 벼룩시장, 줄무늬 벽의 성당을 지난다. 물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젤라또 가게를 만난다.
이탈리아의 더위에 맥을 못 춘 나머지 점심이 되기 전 칵테일을 마시고 만다. 아페롤 스프리츠, 항구 옆 야외 파라솔 아래였다. 환타 색의 아페롤 스프리츠에선 어린이 감기약 맛이 났고, 그러고 보니 부루펜도 이 색이었는데 싶었다. 정녕 이 맛이 진짜일까? 고심하며 한 잔을 다 비우고 나니 놀랍게도 더위가 가셨다. 역시 해열제 성분이 든 것일까. 한결 맑아진 머리로 제노바 여행 계획을 전면 수정한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짐을 꾸려 수영장에 가는 거다.
컵라면을 하나씩 해치운 다음 (꼬마에게 글자를 읽어보라 하니 당당하게 너구리!라고 외쳤다. 땡! 정답은 김치사발면이었습니다) 수영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선다. 혼란의 제노바 도심을 빠져나가 해안도로를 달리니 수영클럽들이 보인다. 여기가 맞나 봐, 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절한 호텔 직원이 어린이와 가기 좋은 수영장이라고 알려준 곳 바로 옆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넓은 수영장과 주황색 파라솔 너머론 바다가 넘실거리는데. 달과 꼬마는 급히 수영장으로 뛰어들고, 나는 썬베드에 누워 자세를 잡는다. 오늘의 책은 <리틀 라이프>. 대학 기숙사에서 만난 4명의 친구들의 이야기다. 배경으로 미국의 여러 도시, 나아가 세계의 여러 도시들이 스쳐가지만 시작과 끝은 뉴욕이다. 뉴욕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끝난다.
여행에서 그 지역이 배경인 작품을 감상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나의 선택은 조금씩 어긋났다. 파리에선 <프란시스 하>와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았다. 뉴욕에선 우디 앨런 대신 <무한도전>을-시차적응이 어려워 제정신이 아니었다- 베를린에선 <리플리>를, 그리고 여기 제노바에선 <리틀 라이프>를 읽으며 구글맵으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와 그린 스트리트를 찾아본다. 가 본 곳, 가보지 않은 곳, 혹은 상상 속의 어떤 곳이든 작품 속의 공간적 배경은 스토리의 든든한 바탕이 된다. 그곳에서 인물들은 방황하고 배회하고 고뇌하고 갈등한다. 거리를 쏘다니다 다른 이를 만나고, 우연 아닌 사고를 당하기도, 때론 그 장소에서 도망치기도 한다. 도망치려 애쓰지만 영영 도망치지 못하기도 한다. 이건 <리틀 라이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해가 기울어 파라솔의 그늘이 점점 멀어진다. 나는 해를 등지고 앉아 이야기를 계속 따라간다. 쉽게 책장-그게 전자책의 커버라 할지라도-을 덮을 수가 없다. 슬그머니 멍든 마음. 그 사이 오늘도 한 톤 더 진하게 그을린 꼬마와 달이 몇 번 썬베드로 왔다가 다시 물에 뛰어든다. 발아래론 검은 모래와 자갈, 옴폭하게 구덩이를 파놓고 다 마신 페로니 병을 꽂아둔다. 그제야 몸을 일으킬 수 있는 나. 꼬마를 꼬셔 수영장 말고 바닷물에 가 보자 하니 의외의 놀이를 한다. 자갈무더기를 파도에 흘려보내며 이르기를 산사태 놀이라 한다. 알 수 없는 꼬마의 마음. 반나절을 해 아래서 보낸 우리는 슬슬 배가 고프다. 저녁은 무얼 먹을까. 나는 갑자기 의욕을 불태우며 이곳에 가겠노라고 선포한다. 당연하게도 가 본 적 없는 곳이다.
이름하여 일 제노베제. 볼로냐에 볼로네제가 있듯 제노바엔 제노베제가 있다. 알고 보니 제노바가 바질 페스토의 원산지라고. 바 질 페 스 토, 다섯 글자를 쓰는 사이 입 안은 벌써 싱그러워진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밝은 초록의 벽이 반긴다.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매트도 연초록이다. 메뉴판을 열심히 탐독한 뒤, 트로피 알 페스토란 이름의 파스타와 대구 요리 그리고 모듬 튀김을 고른다. 식전빵과 함께 작은 절구에 담긴 바질 페스토가 나왔다. 맛있다! 이러다 빵으로 배를 다 채우겠다 싶어 자제하고 있자니 곧 다음 메뉴가 나온다. 뽀얀 튀김옷 사이로 어른어른 노란색의 꽃 같은 이건 뭐지? 호박꽃인가? 싶었는데 맞았다. 입 안에서 바삭하고 부서지는 호박꽃. 여름의 맛이다. 그리고 드디어 파스타가 나왔다. 바질 페스토에 버무린 숏 파스타.
솔솔 뿌린 치즈는 파스타의 열기에 스르르 녹아든다. 한 입 먹으면 싱싱함과 청량함이 물씬 스며든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음식을 꼽으라면 난 여기를 꼽겠다. 다시 간다면 파스타와 뇨끼를 먹을 테다. 그리고 호박꽃 튀김도. 지역에 대한 탐구는 이렇게 구글맵 아이콘으로 저장된다. 수줍어 리뷰를 남기진 않지만, 여기 제 마음에 별 다섯 개 남길게요. 가장자리 선명하고 빈틈없이 채운 노란 별 다섯 개를요. 햇살, 후덥지근한 바람, 페로니, 제노베제 파스타. 그리고 한야 야나기하라로 기억되는 제노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