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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16. 2024

라 가리가 꼰 민아

먹놀잠 메들리에 취해

어디 행사 뛰고 온 거야? 2년 만의 재회, 깊게 끌어안는 포옹 다음 언니가 말했다. 아, 행사 아니고 저기 제1보수당 전당대회 다녀왔어요.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선명하게 붉은 자켓 차림이었다. 모양은 포멀하고 색은 강렬해 연단에라도 올라야 할 것 같은. 우중충한 독일의 봄이 지겨워 충동적으로 샀던 자켓. 그 진한 빨강을 아무 때에나 입을 수 없어 나는 특별한 때, 특별한 곳에서만 입기로 했다. 빨강이 잘 어울릴만한 장소를 골라서. 이를테면 베트남 레스토랑, 중국집, 그리고 여기 바르셀로나의 라 가리가.

우리의 만남은 느린 궤도의 별들처럼 이따금씩 이뤄졌다. 여름의 몰타, 여름의 바르셀로나, 가을의 바르셀로나, 다시 가을의 바르셀로나. 시작점은 구기동이었다. 나란히 붙은 옆집, 처음 만날 땐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생과 전역한 어른이 되기까지. 시간이 어찌 이리 빠르게 흘렀는지 몰라. 언니는 그때처럼 주방을 바라보는 바 자리를 내어주었다. 에바 사장님과 나는 나란히 앉아 메뉴판을 들춰보다 그냥 언니가 내어주는 음식들을 먹기로 했다. 상냥한 직원이 와서 묻기에 도스 비라,라고 말했다. 하포네즈? 알람브라? 물을 땐 알람브라. 언니는 맥주 하나는 완벽하게 주문하네,라고 말했다. 그래서 직접 빚은 군만두와 야끼소바, 연어아보카도 덮밥을 신이 나게 먹는다. 초록병의 알람브라 맥주와 함께.


레스토랑엔 차차 손님들이 들어찬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부엌에선 여러 개의 팬이 뜨겁게 끓는다. 먼저 가 있어, 나중에 밤에 만나자. 언니의 말에 집 주소를 묻는다. 바쁜 칼질과 솟는 김 사이로 빠른 어조의 답이 건너온다. 구글맵에 이렇게 쳐, 까사 민아라고. 뭐라고요? 구글맵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고요? 에바 사장님과 나는 그 주소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작고 오밀조밀한 마을. 아담한 광장을 지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니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알려준 비밀번호로 열쇠함의 열쇠는 찾았건만 문을 여는 것엔 실패한 우리. 번갈아 가며 이리저리 열쇠를 돌려보지만 문은 열릴 듯 열리지 않는다. 이러다 문 부수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작게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육중한 문은 한 눈에도 아주 오래되어 보인다.


문뿐만이 아니다. 올려다본 건물은 자기만의 역사를 가진 듯 보인다. 둘째의 학교를 찾아 이 마을에 정착한 언니는 아이 점심 도시락을 매일 싸주었다. 아이가 도시락통을 열 때마다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그에 용기를 내 언니는 작은 가게의 한켠을 빌려 도시락집을 열었다. 그러다 입소문이 나 여러 테이블이 들어찬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다. 그와 비슷하게 여행자들에게 방 한 칸을 빌려주다(지난번엔 이곳에 묵었었다) 이제 크나큰 저택을 사 버렸다. 집을 샀다는 연락을 받고는 어찌나 놀랐는지. 근데 여기 싹 수리해야 해. 다 되면 꼭 놀러 와. 수영장도 있어!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안 열리는 문 앞에서.

커피 한 잔의 농땡이 후에 다시 찾은 문은 너무 쉽게 열렸다. 안에 걸쇠가 잠겨있었던 터. 나는 그 옛날의 꼬마를 다시 만나 반갑게 안고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다. 그랬구나, 지금 고3이라며? 대학은 어느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묻자 훌쩍 커버린 꼬마가 말한다. 언니, 지금 그 얘기는 하지 말고요. 그래서 우린 웃는다. 나 너무 전형적인 먼 친척 같았네. 게스트가 머무는 층엔 넓은 거실과 부엌, 3개의 방과 2개의 화장실이 있다. 거실엔 벽난로, 언니의 취향이 보이는 책들도 있다. 구석엔 크게 솟은 나무가, 곳곳엔 앤틱 가구와 거울들이 놓여있다. 발코니 창으론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산과 산이 어우러진, 그래서 구기동의 북한산 자락이 떠오르기도 하는 그런 풍경.

우리가 잘 방엔 2개의 싱글베드가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충전기 자리를 찾은 다음, 자연스럽게 각자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와, 이불이 너무 포근한데요? 정말이지 그랬다. 보드랍고 폭신하고 그러면서 적당한 무게감이 있어 몸을 폭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핑퐁처럼 침대를 건너가던 우리의 대화는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오랜만의 단잠.


일어나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머쓱한 얼굴로 우리는 거듭 말한다. 이 방 너무 꿀잠방이군요! 모든 피로가 가셨어. 그럼 이제 슬슬 저녁을 먹으러 가 볼까요? 이건 뭐 영유아기를 답습하는 기분이다. 먹놀잠 먹놀잠.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면 모든 게 만사형통인 그런 시기. 그저 할 일은 쑥쑥 자라기만 하면 되는 때. 동행하는 이가 스페인어 능통자인만큼 내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쓱 들어간 타파스 레스토랑에선 친절한 직원이 모든 메뉴를 세세히 설명해 주고, 에바 사장님은 그 모두를 잘 알아듣는다. 친절한 게 최고야, 에바 사장님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동네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들과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옆에 서서 애매하게 웃는다. 너희 놀러 온 거야? 친구 집에 왔어요. 오, 친구? 까사 민아요. 아! 그 커다란 집? 나 그 옆집에 살아.


그러니까 언니는 이 마을의 유명인사다. 레스토랑 저녁 영업이 마치는 10시 반, 아직 손님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또다시 알람브라 맥주를 마신다. 마지막 손님이 떠나자 언니는 와인 한 병을 들고 우리 앞에 앉는다. 맑고 청량한 와인이다. 셋이서 이렇게 모여 건배를 하다니, 새삼 마음이 흡족하다. 우리 셋은 조금씩 겹치는 지점들이 있다. 육아 혹은 육묘, 자영업의 기쁨과 슬픔, 책과 에어비앤비, 그리고 스페인 스페인 스페인. 벤 다이어그램은 그렇게 얼룩덜룩 다채로워진다. 자, 이리로 이사와요. 스페인이 좋으면 스페인에 와서 살아야지. 이런 강렬한 플러팅도 있었다. 1년이 지났지만 아직 계속되는 지난한 집수리 과정 브리핑도 있었다. 재무제표 점검 다음엔 요가 간증도 이어졌다. 마성의 이불 탐구와 5미터짜리 고무나무에 대한 경탄도.

자리를 파한 건 새벽 2시. 함께 까사 민아로 향한다. 별은 점점이 뿌려져 있다. 마을은 고요하다. 빈 수영장도, 나이 많은 올리브 나무도 모두 조용하다. 언니는 2층, 우리는 3층. 꿈지럭거리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어서도 다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러고 있으니 무슨 수련회 온 것 같지 않아요? 어둠 속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제법 깊어진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깊은 잠. 좋은 잠.

다시 만나, 잘 지내. 다정한 인사 뒤 우린 기차에 오른다. 덜컹덜컹 바르셀로나 센트로로 향한다. 기념품 가게를 두어 번 들리고 (바르셀로나 버스와 택시를 하나씩 샀다) 포르트 벨을 지나 바르셀로네타로 향한다. 날은 화창하고 거리는 북적인다. 우리는 시선을 교환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나 좋은걸. 어쩜 이렇게나 멋진걸. 게다가 맛있는 건 너무 많다고. 사람들이 올 수밖에 없어. 하며 작은 타파스 가게에 줄을 선다. 창가엔 기다려주신 만큼 제대로 보답하겠다는 문구가 결연히 쓰여있다. 그 다짐은 거짓이 아니어서 우린 먹고 마시고 감탄한다. 까냐, 샹그리아, 끌라라로 이어지는 늦은 점심. 2박 3일, 한 끼도 대충 때우지 않았다. 다음에도 역시 그러겠지. 너무 멀지 않은 때에 다시 만나겠지. 그걸 알아 쉽게 손 흔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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