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일일기

해를 찾아 마요르카

요시고의 바다와 튜닝의 끝

by 한량

여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역시 꺼내기 좋은 화제는 날씨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날씨는 날로 새로우니까.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이나 독일어 교실, 가끔은 펍의 바에서도 나는 날씨 이야기를 꺼낸다. 내 부족한 어휘는 탄소 발생이나 기후 위기 같은 주제엔 다다르지 못하므로 달싹달싹 아는 단어들만 수줍게 잇는다. 레인 자켓.. 해 없어.. 추워요.. 가을 방학.. 당신은 어디로 여행 가나요?


그들은 추위에 익숙한 얼굴로 끄덕끄덕거리다 여행이란 대목에 이르면 얼굴이 밝아진다. 스페인.. 이란 단어를 꺼내면 그들의 얼굴은 미소를 넘어 환희에 가득 찬다. 긍정적인 피드백에 기운 낸 내가 마요르카..라고 말하면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하다. 눈을 빛내며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 따뜻한지, 맛있는지 알려주지 못해 안달이 난다. (이 자체가 독일인의 국민성에 반하는 태도다) 이야기의 말미는 항상 이렇다. 거기 가면 많은 독일인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게.. 좋은.. 건가요..? 라고 묻진 못했다)


정말이지 그랬다. 거의 급행 지하철 간격만큼 촘촘하게 남으로 떠나는 비행기. 성급한 마음으로 벌써 반팔 차림인 이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고들 있다. 모자를 맞춰 쓴 아저씨 단체도 보았다. 주문제작한 것이 분명한 벙거지엔 모자 주인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진정으로 행복해 보여 나는 잠시 친구들을 생각했다. 다운받은 드라마를 보며 뜨개질을 조금 하다 보니 어느새 대륙을 넘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그리고 섬, 섬이 보였다. 여름 최고 온도 31도, 겨울 최저 온도 7도인 축복받은 섬. 10월 초엔 15도에서 25도 사이라고 했다. 산뜻하고 쾌적한 바람. 햇살과 햇살. 올라와 아디오스의 세계에 무사히 내려앉았다.

공항에서 팔마 시내로 들어가는 길, 우리의 가슴은 뛴다. 바다를 낀 해변 도로엔 야자수들이 잎을 펄럭인다. 늘어선 요트들과 호텔들. 모두를 내려다보는 대성당의 위용. 대성당의 색은 짙은 황토색이다. 폭이 넓고 거대해서 언덕에 자리 잡은 메주.. 같기도 하다. 짧은 여행자의 눈에 바닷가 해안 도로의 풍경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그건 우리가 성수기의 끝자락에 와서 그러기도 할 것이다. 그건 야외 수영장의 오픈 기간과 똑같다. 10월 말까진 해 아래서 수영할 수 있지만, 11월부터는 실내 수영만 가능하다. 관광객들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상점들도 문을 닫아 더욱 한산해질 테고.


그래서 나는 6개월 일하고 6개월 쉬는 삶을 상상해 본다. 성수기엔 주말도 없이 바쁘게 일하고, 늦가을부턴 셔터 내리고 쉬는 삶. 그건 해를 따라 움직이는 삶 같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잔다. 해가 떠 있는 시기에 일하고, 해가 드문 시기엔 쉰다. 자연과 완벽히 맞물리는 삶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렇게 골똘하게 해에 관해 생각하는 나 자신이 생경스럽다. 그러니까 독일에 살게 되면 누구나 해에 대한 지론 하나쯤은 생기는 거구나. 그리고 대부분 그 방향은 같구나. 햇살은 다다익선이라고. 이어 문득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라던 페퍼톤스의 가사를 떠올리고, 일조량에 따라 출렁이는 남유럽행 비행기 값을 생각하며 뭔가 붙기는 붙는 모양이라고 결론 내린다.

썬베드에 누워 굼뜬 동작으로 해를 즐긴다. 전자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뜨개실을 풀어낸다. 꼬마는 첨벙첨벙 왕복하길 멈추지 않고, 자꾸만 엄마 들어와 엄마도 들어와 한다. 몇 번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꼬마는 집요하다. 결국 나는 무릎부터, 허리까지, 그리고 숨을 흡 들이마신 다음 어깨까지 물에 담근다. 만성 수족냉증 환자에겐 이게 최선이다. 남보다 엔진 점화가 늦고, 효율도 좋지 않다. 오래된 보일러 같달까. 그래서 겨울이면 뭘 감고 두르고 붙이고 껴입고 하다 결국 그 무게에 먼저 기진맥진하고야 만다. 특히나 발은 마치 소속이 다른 것인 양 늘 자기만의 온도를 주장하고 있다. 가장 늦게 데워지고 가장 빨리 식는다. 밤이면 이불 안에서 새우 자세로 누워 두 발을 서로 부비며 열을 좀 내보려 한다. 하지만 언제나 물에 적신 부싯돌 같은 발.

쓰다 보니 한약 체험단 후기 같다. 아무튼 그런 이로서 마요르카의 넉넉한 햇살은 참으로 감미롭다. 불과 한 달 전의 온도건만 뭘 입고 다녔는지 가물거려 긴 팔을 몇 개 챙겼거늘, 입을 일이 별로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호기롭게 떠나보기로 한다. 요시고의 사진으로도 유명한 칼로 데스 모로. 지도를 꺼내 가볼 만한 바닷가를 체크해 주던 페드로 아저씨는 흠, 거길 왜, 굳이 이런 말을 붙였지만 우리는 이왕이면 다홍치마 란 관광객의 모토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내려쬐는 햇살을 받으며 섬의 동쪽으로 향한다. 별다른 시설이 없으므로 미리 먹을 것을 챙겨가야 한다는 말에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사과 몇 알, 주스와 맥주, 그리고 편의점에서 산 하몽 보까디요. 썬베드용 수건과 수영복까지.


주차장은 무료였다. 그곳에 차를 대고 20여분을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해는 벌써 중천, 가릴만한 그늘도 보이지 않는다. 페드로 아저씨가 준 페도라를 쓴 꼬마의 입은 툭 튀어나오려고 한다. 페도라와 흰색 민소매 티셔츠, 코랄색 반바지, 그리고 어제 팔마 시내에서 산 산호며 조개가 달린 목걸이까지. 파블로.. 에스코바르.. 같다. 나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불편해진 심기를 누그러뜨리고자 선뜻 등을 내민다. 그는 순순히 업혀 들었고 나는 끙차하고 일어서 극기훈련을 시작한다. 마요르카 아니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느낌이 든다. 이 길 맞겠지 하며 걸어가는데 슬며시 불안해지는 것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이들이다. 벌써 놀만큼 다 놀고 파하는 시간인가? 바닷물이 차가운가? 싶다. 그러다 한국인 커플 같은 분들이 오고 계시기에 나는 덥석 묻는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예전엔 이런 질문을 들으면 입 닫고 고개 절레절레 흔들어야 한다는 농담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젠 그런 유럽여행적 플러팅은 다른 세계다. 친절한 한국분들은 등산길의 선한 거짓말을 해주신다. 이제 좀만 더 가면 되어요 같은. '저기.. 거기 가면 혹시 그늘이 있나요?' 나는 애처롭게 묻는다. '아.. 그늘..' 그 말줄임에서 이 시각에 명당 스팟을 탐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훈계를 들은 듯했다. '음.. 동굴 아래에 가면 그늘 좀 있어요.' 알쏭달쏭한 전언에 감사를 표한 뒤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파블로의 기분은 점점 나아졌으며 그와 비례해 상체는 꼿꼿해져 내 등엔 하중이 더 실렸다. 지게 같은 게 있으면 좋으련만, 망상은 민속촌까지 가닿는데 드디어 진입로가 시작했다. 천길 낭떠러지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고, 촘촘한 계단이 바다까지 이어졌다.

드디어 분리된 우리는 조심스레 손만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한 걸음 내딛을수록 말도 안 되게 진하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와, 와. 이 고생을 하고 올 만한 가치가 있었어. 절벽에 자리한 소나무들, 켜켜이 쌓인 돌로 이뤄진 절벽. 푸른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 재미있는 건 어떤 인공적인 시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탈의실이며 휴지통이며 매점이며 레스토랑이며 썬베드며 뭐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린 바위 뒤에서 허겁지겁 수영복을 갈아입는다. 정말 조그만 그늘을 찾아 가방을 부려놓는다. 얌전히 신발도 벗어둔 뒤 한 발 한 발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물은 시원하다. 춥지가 않다. 수영장과 다른 느낌이 신기하다. 양팔과 다리를 내저으며 좀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 팔튜브를 낀 꼬마도 열심히 따라온다. 어느새 물색이 달라진다. 민트색이 아닌 진한 남색의 진짜 바다다. 당연히 발이 닿지도 않으니 잠시 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절벽 아래 바위를 찾아 손으로 더듬어본다. 바위 위엔 이끼가 두툼해 마치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다. 살이 쓸리거나 수영복이 찢길 염려가 사라지자 나는 꼬마더러 여기 올라오라 손을 흔든다. 이끼는 폭신하고 물은 시원하고 해는 따사롭다. 절벽 위에선 연신 용감한 다이빙이 이어지고 흰 물보라가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곤 한다.

나는 바다사자가 된 기분이다. 한껏 느긋하고 두툼해진 마음이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러다 다시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배가 고프면 보까디요를 힘차게 베어문다. 바위에 걸터앉아 마시는 에스트레야 담은 뜨뜻미지근함에도 최상의 맛이다. 아니 어떻게 이 아름다운 바다를 그냥 냅둘 수가 있었지? 마요르카 사람들 뚝심이 대단하다. 무료 주차일 때부터 그 배포가 남다르더니 정말. 나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다. 그러니까 여기 입장료 받아서 그 돈으로 화장실이랑 탈의실 만들고 간이샤워장에는 모래 털고 가세요 문구 써 놓고, 저기 그늘 아래선 해녀 할머니들이 성게랑 해삼이랑 낙지랑 개불이랑 썰어주고, 마무리로 라면 끓여주고 그치? 절벽에서 다이빙할 때마다 팡팡 자동으로 연사 터지는 인생네컷 요시고 에디션 만들고 말야.

그렇지만 진짜는 다르다. 마요르카 사람들은 이런 삿된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나아가 기지국 하나 설치해두지 않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이들은 머무는 동안 디지털 디톡스까지 하게 되는 거다. 세상에, 뭔가 멋있네. 그래,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더니. 그냥 바다는 바다답게 냅두는 것이 제일 아름다운 거구나. 그게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줘서 사람들이 또 찾아오는 거구나. 맥주 한 잔 걸친 나는 깔끔한 결론 아래 손쉽게 행복해진다. 누가 햇살에 뭘 붙인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붙이든 말든 하며 드러눕게 된다. 그것이 겨울을 준비하는 독일(거주)인의 자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Ich mag Li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