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아카이빙 해 둔 오후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뒷좌석 카시트의 꼬마 둘은 간식을 먹으며 떠들었지만, 점차 눈이 개개 풀리고 있었다. 반나절 신이 나게 놀고 차를 탔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핸들을 잡은 나는 잠시 음악 채널을 바꿨다. 마틸다 뮤지컬 넘버도 그만, 케이팝 데몬헌터스 OST도 이제 그만, 그렇게 감정을 고양시키는 (나아가 기존 체제 전복을 시도하려는) 음악은 이제 안녕이야, 이제 애플뮤직의 '편안한 피아노 음악'을 들어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이어지는 나른한 멜로디, 꿈인 듯 현실인 듯 몽롱하게 가물거리는 선율.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어 버려라. 꼬마들은 잠시 낑낑댔다. 나는 룸미러로 꼬마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곧 뒷좌석이 조용해졌다. 후후, 남미 나이트 버스 작전이 통했어. 수면 가스랑 마취총 없이도...! J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럴 땐 꼭 강아지 같다니까. 아무튼 잘 때가 제일 예뻐요. 우리는 마음 깊이 공감했다.
아우토반이 아니니 국도라고 불러야 할까. 구불구불 흐르는 도로는 낮은 언덕과 밭을 타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언덕엔 무심하게 선 풍력발전기들. 그 위로 쏟아지는 봄햇살. 우리는 어젯밤 저녁, 다소 번잡스럽고 부산스러웠으나 그래도 무서운 눈과 이 악물고 낮게 읊조리는 '이따 방에 가서 보자' 없이 마무리한 저녁식사를 생각했다. 하우스 와인은 고되고 보람찬 하루의 좋은 벗이었다. 나는 하우스 와인 시키면 목만 겨우 축일 듯이 쪼끔 따라주는 곳 말고, 아예 작은 유리병에 와인 담아주는 곳이 좋더라. 참된 레스토랑 같아. 그러니까 이곳 독일에서 와인을 마시지만 근원은 스무 살 학사주점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작은 항아리에 출렁출렁 넘실거리는 동동주, 그 위에 뜬 조그만 바가지. 두부 김치와 파전, 언제나 콕콕 뿌려진 깨들. 얄궂은 농담과 시시껄렁한 갈굼. 나는 그러려고 대학교를 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일정 부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잘 상상이 안 돼. 우리 부모님은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셨어. 나와 동생이 장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을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말했어. 둘 다 크게 부모님 뜻 거스르지 않고 과를 선택했고, 뭐 그렇게 밥벌이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나는 내가 어떤 비전을 보고 어떤 방향을 권유해 줄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어. 나는 다시금 룸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살핀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꼬마들. 얘네는 대체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J와 나의 대화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흘러갔다. 그리고 그건 未知의 영역답게 굳은 커튼을 드리우고 있었다. 커튼의 색조는 어둡고 탁하다. 저 뒤엔 대체 뭐가 있을지? 그게 분명 핑크빛은 아닐 거야... 로맨틱코미디보단 스릴러를, 러브 서바이벌 프로그램보단 그것이 알고 싶다를, 에밀리 파리에 가다보다 블랙 미러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넷플릭스 페이지는 온통 검고 벌건 배경과 강렬한 타이포, 핏발 선 눈알들로 가득한데. 무서운 것을 제대로 무서워하고 두려운 것을 미리 두려워함으로써 인생을 대비해 온 것 같은데, 이젠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혹자는 이미 우리의 미래는 인공지능에 의해 결정되었으니, 지금의 아날로그적 삶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고 하잖아. 그런데 그건 마치 휴거론 같기도 하니까... 우리에겐 내일은 없어! 하면서 가진 모든 자원을 끌어다 썼는데, 막상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반대로 악착같이 모으고 아꼈는데 그렇게 모은 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통잔 잔고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양말 짝 찾아서 빨래 개고 머리 싹싹 감겨주고 분리수거 같은 거나 하랬더니, 인공지능들이 보고서 쓰고 예술하고 수능문제 만점 받고 있잖아. 점점 직업들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것처럼 보여. 전화교환수랑 엘리베이터 걸 생각나? 나는 어릴 때 엘리베이터 걸이 무서웠어. (역시나 무서운 게 참 많았던) 그렇지만 각 잡힌 모자와 단 끝에 살짝 달린 베일은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 (모자 사랑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것으로) 세상에, 그 사람들은 하루 종일 구두 신고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던 거네.
우리 애 장래희망은 버스운전수란 말이야. 근데 차마 나서서 그 꿈을 와장창 깰 수는 없더라고. 얘야, 미래엔 아무도 운전하지 않을 거란다. 어쩌면 핸들을 잡는 사람은 구속될 수도 있어. 너의 아이는 (생물학적 번식이 허락된다면) 말도 안 돼! 사람이 운전을 했다고요? 너무 위험해요! 어떻게 비이성적인 존재가 운전을! 할 수도 있다고. 어린 시절에 종이지도 보고 운전하던 아빠가 신기한 것처럼. 그래서 직업들이 다 사라지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돈이 지급된다면... 근데 그 돈은 다시 다 구독료로 빠져나갈 거 같아. 필수로 구독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는 거지. 지금처럼 먼 산 바라보고 딴생각하면서 광고가 지나가길 기다리면 될 일이 아닐 거란 거. 지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구를 이용하고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하잖아. 예를 들어 살을 빼고 싶어서 위고비를 맞고, 돈을 내고. 그런데 나중엔 어떤 이상적인 상태, 즉 목적 그 자체를 '구독'하게 될 거 같아. BMI수치, 체지방률 얼마 이하의 만족스러운 상태를 구독하는 거야. 구독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쉽게 취소할 수 없는.
그때 되면 지금의 다이어트, 성형 수술은 얼마나 미개한 것으로 비칠까? 세상에, 칼로 뼈를 깎았다고요? 튜브를 넣어서 지방을 뽑아냈다고요? 때론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고요? 마치 우리가 중세의 수술법을 보고 경악하는 것처럼. 마취제 없이 생살을 찢고, 항생제 없이 농양을 짜냈던 기록들 말야. 우리가 손자를 볼 수 있다면 놀라운 눈으로 질문하는 아이에게 나는 되게 머쓱해하며 그래.. 그때는 그러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죽기도 했지.. 지금은 잘 상상이 안 가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잘 자려무나.. 좋은 꿈 꿔. 하며 통통한 궁딩이를 툭툭 쳐주다 4D 전화를 끊을 지도.
역시나 나의 비관론은 생생하게 반짝인다.
J는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해야 살 수 있으리란 명제에 몰두한다. 인공지능이 결국 대다수의 인간은 지구 문명 전체에 해만 된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때, 우리는 안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따위 새로 제정되는 국제법으로 가볍게 즈려밟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무해하고, 나는 충성스럽고, 나는 살아야 할 의미를 가진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고. J는 인간의 착실한 반려동물이 된 개를 떠올린다. 먼 옛날 야생의 삶을 버리고 떠나와 인간에게 충성하며 제1 반려동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개들을. 그러게. 야생성 다 죽이고, 순하게 꼬리 흔들고, 그러면서 집도 지키는. 주인을 위해 때로 목숨을 걸기도 하는 그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개들을. 결국 우리는 다 같이 진화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라. 살아남기 위해서 육체적, 정신적인 구조를 모두 개조하는 게 진화니까. 아무래도 이러거나 저러거나 뼈를 깎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겠네.
하지만 결국 그런 세상이 오면 진정한 성평등도 이뤄질 거야. 그건 지금처럼 가진 쪽에서 적선하듯 조금씩 권리를 나눠주는 것으론 절대 오지 않아. 인간들끼리의 육체적 능력 차이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때가 되어야 평등의 첫 단추가 끼워질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인간 종들끼리의 능력치를 비교하고 누가 잘났니 누가 못났니 할 필요도 없을 때 아이러니하게 평등사회가 오지 않을까. 우리가 백사장의 모래알끼리 우열을 가리지 않듯. 잠시 밝아지려 하던 상상은 더욱 깊숙하게 처박히고 만다. 그러니까 그전에 진짜 현실을 많이 살고 겪어봐야 하는 거 같아. 나는 그래도 이미 좋은 거 나쁜 거 많이들 겪어본 거 같아서 그렇게 아쉽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걱정되긴 한다. 뒷좌석에선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무겁고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데, 풍경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언니, 이거 좋아하세요? 세심하게 준비해 둔 커피우유를 쪼록쪼록 빠니까 더더 아름다워 보인다. 이거 맛있네. 네, 저는 세일할 때 한 박스씩 사놔요. 달콤하게 미끄러지는 수다.
멀미와 소란 없이 무사히 동네로 진입했다. 꼬마들은 슬슬 잠에 깨어 두 눈을 껌뻑였다. 안전하게 잘 왔다는 안도감 반, 재미있는 이야기가 끝나 아쉬움 반이었다. J는 며칠 후 유튜브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음악도시 설특집 라이브 방송, 게스트로 윤종신과 장항준이 나온 편이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프리미엄 구독을 하지 않은 탓에 화면이 꺼지면 방송도 따라 꺼졌다. 결국 화면을 줄곧 켜놓은 채로, 주머니에 조심스레 핸드폰을 넣고 봄날의 거리를 쏘다녔다. 낄낄거리며 퀴즈를 맞히는 셋의 젊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종종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트램에서 갑자기 웃는 여자, 횡단보도에서 껄껄거리는 여자, 그게 나였다. 내 마음속의 단골이었던 아이리시 펍의 바텐더는 드디어 나를 기억해 주었다. 너 예전에 여기서 글 쓰지 않았어? 응, 맞아. 그랬었어. 펜을 빌렸던 터라 기억하고 있나 보다. 오늘은 뭐 할 거니? 나는 전자책을 들여보였다. 오늘은 이거야. 그리고 기네스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화면을 눌러 북마크한 페이지가 많고도 많았다.
몰라, 나중에 우리 모두의 뇌가 회로에 연결되어 인류 정신 전체가 아카이브 된다면 오늘의 이 기억도 업로드되겠지? (자르지 말아 주세요) 2000년대의 라디오를 듣고, 좋아하던 디제이를 추억하고, 한낮에 마시는 기네스의 맛과 재미있는 소설집과 그걸 추천해 준 친구에 대한 기억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트램을 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해는 뜨겁고, 파인트 한 잔만큼의 기네스를 채운 내 몸도 따뜻했다. 아침에 받은 편지-직접 그린 과일 카드가 동봉된-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