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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것은 물, 여섯 개 들이 맥주가 다였다. 장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 또는 여비의 절약 이전에 기쁨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가벼운 주머니로도 살 수 있는 행복. 집 가까운 곳에 커다란 시장Mercat del Nino이 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시장 건너편에는 거리 이름을 딴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지날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지, 큰 시장 앞에는 언제나 싸고 인심 좋은 밥집이 있기 마련.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자 너른 공간 안에 작은 점포들이 줄을 이었다. 과일, 채소, 고기, 생선부터 치즈나 달걀만 파는 상점도 있다. 색색의 과일들은 흐트러짐 없이 산을 이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자리에는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밥집들도 있다. 카운터 앞, 얼음 위에는 눈을 부릅뜬 생선들이 누워있다. 메뉴판엔 영어가 하나도 없어, 우리는 머뭇거린다. 그러니까 이걸 아마도 저렇게 조리해서 주는 건가? 물음표를 이마에 단 우리는 시장 전체를 느릿느릿 돌아본다. 그리고 제일 예뻐보이는 가게에서 일용할 과일을 사기로 한다. 바나나 한 손과 납작복숭아와 체리, 그리고 살구.
시장 지하에는 마트가 있다. 여행 내내 마트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오렌지 주스 기계를 찾아다녔다. 커다란 기계 앞엔 크기가 다른 페트병들이 있다. 제일 큰 병을 골라 기계 아래다 대고 레버를 누른다. 그러면 제일 위칸에 쌓여있던 오렌지들이 하나씩 굴러내려온다. 롤러가 회전하며 반으로 갈라진 오렌지들을 꾸욱 짜낸다. 병 가득 주스를 채우는 데에 3유로. 한 번은 과연 몇 개의 오렌지가 들어갈까 궁금해 세어보기도 했다. 열서너 개의 오렌지가 쿵쿵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그런 걸 지켜볼 때 유난히 빛나는 내 눈. 흡족한 웃음. 참새 방앗간이 따로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을 차린다. 여름의 맛이 밴 복숭아. 이때부터 아무 때나 맥주가 등장하곤 했다. 여행 전 탈이 나 며칠을 굶었다. 티백으로 된 보리차를 계속 마시며 속을 달랬다. 당연히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아침 밥상부터 늦은 밤 야식까지 물처럼 맥주를 마신다. 그렇게 일상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웃음이 헤퍼지고 매 순간이 나른해진다. 집 떠난 지 오십 시간, 아직 달과 다투지 않았다. 날씨와 맥주가 우릴 그렇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