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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과일과 맥주의 힘을 빌어 낮잠을 잤다. 낮잠은 낮잠인데, 깨고 보니 열한 시다. 밤 열한 시. 손쉽게 반나절이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누운 달을 깨워 밤마실이라도 나가보려 했으나, 도통 일어나질 못한다. 이젠 인정해야 할 때가 왔는가. 내 몸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자는 달을 두고 노트북을 켰다. 의미 없이 원고를 열어본다. 비행기 안에서 조금이나마 일을 해보려 했던 것은 정말 조금이 되었다. 매드맥스와 코코를 보고, 두 끼의 기내식과 쪽잠 사이 그래도 뭔가를 하려 했던 노력은 가상하다. 티끌모아 태산이란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머리가 굴러가지 않을 때면, 남은 페이지 수를 마감 날짜까지 남은 날로 나눠본다. 하, 그럼 하루에 두 페이지씩만 쓰면 되겠네. 물론 날이 갈수록 하루 할당량의 페이지는 늘어만 간다. 예정된 게으름의 말로.
자, 오늘은 무엇을 할까. 날이 좋으니 바다를 가자. 몸을 첨벙첨벙 담글 생각은 없어 보통 때의 차림으로 나선다. 어제의 강아지 공원을 지나고, 대학가를 지나고, 쭉쭉 뻗은 대로를 따라 아래로 향한다. 여행자들을 태운 이층 버스가 지나고, 익숙한 상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게의 셔터가 올라가고, 지하철 역 입구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Fnac이 보이는 걸로 봐서 까딸루냐 광장 근처인 듯싶다. 여기 소공동 같다, 우리는 우리끼리 속삭이다 웃는다. 머릿속 지도가 이렇게 겹쳐진다. 날은 화창하고 바람은 선선하다. 우리는 힘차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걷는다. 아직 사람들이 밀려들기 전인 람블라 거리를 걷는다. 의식적으로 가방끈을 추켜매지만, 그러기엔 서로의 간격이 널찍하다. 몹시 쾌적한 산책. 이윽고 코끝에서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옛 영화를 기리는 듯 콜럼버스가 탑 위에 서 손을 멀리 뻗고 있다. 그 손가락 끝은 항구 너머 바다를 향한다. 동상을 둘러 항구 건너로 넘어가려는데, 다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근처에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을 보면 곧 다리가 연결되려나보다. 우리도 잠시 서서 땀을 식힌다.
나무 데크로 연결된 다리가 이쪽으로 밀려온다.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기 시작한다. 데크 사이로 바닷물이 보여, 나는 일부러 그걸 달에게 알려준다. 발아래 이는 파도에 무서워하는 것을 보려고. 높은 전망대, 특히 썩 믿음직하지 않은 펜스로 둘러진 곳에선 우리 둘 다 멈칫거리기 일쑤다. 높은 곳인 만큼 휭휭 부는 바람에 미약하게 손을 떤다. 올라왔으니 사진은 찍어야지, 하며 둘의 얼굴을 붙여봐도 미소는 가식적이다. 그런 나도 물가에선 한껏 늠름해진다. 여기에선 홀랑 떨어져도 금세 헤엄쳐 건널 수 있지. 상어만 없다면 말이야.
한산한 마레마그눔을 거닐다 커다란 챙의 모자를 산다. 멕시코 선인장이 된 느낌이다. 그걸 쓰고 바다와 마주한 테라스에 앉는다. 개방형 건물을 볼 때마다 그게 몹시 부럽다. 사시사철의 온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증거일 테니. 궁금해 찾아본 바르셀로나의 연평균 최저 온도는 1월 8.9도, 최고는 8월 23.7도 란다. 머리를 굴리는 대신 손쉽게 계산기를 켠다. 연교차 14.8도. 극한의 공포와 극서의 고통을 아는 한국인은 몰래 눈물을 훔친다. 홧김에 가출한 단군이 쌈짓돈 털어, 반지하 셋방에 나라 세웠다는 게 정설처럼 여겨진다. 엘리와 나눈 이야기에도 바르셀로나 겨울 이야기가 나왔다. 보통 눈이 내리지 않는데, 지난겨울엔 예외적으로 2번 눈이 왔다고. 서울은 어떠냐고. 나는 말없이 겨울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극히 평범한 서울의 눈. 지붕의 윤곽을 허물고 차들의 걸음을 묶고 온수관을 터뜨리는 눈. 한밤에 자다 일어나 골목길을 쓸게 만드는 눈.
어쩌면 그래서 가끔 불볕더위가 이어지면 유럽 사람들이 죽기도 하나보다. 중동 지역에서 기상 이변의 한파로 사고가 나는 것처럼. 그래, 한국인의 유전자엔 끊임없는 단련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을 터. 두터운 패딩과 스노우 부츠, 온수매트와 가습기에서부터 공기청정기를 지나 제습기와 선풍기, 에어컨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이삿짐이 버거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너른 광장의 벤치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조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면 야자수 사이로 새파란 하늘. 그럴 때면 원고고 뭐고 돌아갈 날짜며 멀지 않을 이사 계획 같은 속세의 근심 걱정들이 사라진다. 사람이 단순해진다. 나는 단순한 내가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