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가 뭔가요

MBTI가 뭔가요

by 한량
4 Desayuno 복사.jpg

8절 스케치북을 편다. 검은색 색연필을 들고 7개의 칸, 6개의 줄을 그린다. 눈대중으로 그리느라 선은 조금 삐뚤고 간격은 살짝 들쭉날쭉하나 맨 윗 줄에 요일을 차례로 적고 나니 달력다운 달력이 완성되었다.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를 위한 달력이다.


MBTI 같은 건 대학 교양에서나 해 봤던 기억이다. 수많은 조합 중 내가 어떤 타입이었는지는 흐릿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고르는 대신 '바라는 나'의 모습을 체크했던 것 같다. 이런 이런 모습의 나라면 참 좋겠는데? 멋있겠는데? 하며. 최근 몇 년의 MBTI 열풍을 보면서는 좀 과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서로의 합을 점치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물론 소수의 이야기겠으나 취업 면접에서도 MBTI를 묻는다는 것은 나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과몰입은 내 주변에도 있었고 그는 나랑 꽤 친했고 계속해서 MBTI 관련 꽁트 링크를 내게 보내왔고 물론 나는 그걸 클릭하지 않았지만 재차 내 유형을 묻는 바람에 나는 하는 수없이 제 손으로 검색창에 MBTI 검사라고 치고 들어가선 신빙성 없어 보이는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을 하고 말았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나는 j로 끝나는 유형이었다.


설명을 좀 읽어보니 나는 꽤나 j 같았다. 너무나 j 같아서 j가 아닌 J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다분히 계획적이고 또 계획적인 유형, 그게 나였다. 어떤 프로젝트든 디데이가 정해지고 나면 달력과 여백이 많은 종이가 필요해졌다. 작은 프로젝트는 몇 줄 안 되는 체크리스트로 끝났지만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병풍과 같은 목차가 생성되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 일의 양을 계량해 남은 기간으로 나누었다. 하루에 쳐내야 할 양이 정해지면 그다음부터는 그냥 묵묵하게 하면 되니 머리 아플 일이 없었다. 매일 혹은 며칠에 한 번 일의 진척 정도를 확인하며 작업 속도를 빠르게 혹은 느슨하게 조정하였다. 나에겐 이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예를 들어 즉흥적인 p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에겐 내가 미친 과학자처럼 보일 것이다. 라고 썼다가 '미친 과학자'는 p유형에게 더 걸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j는 그와 다르다. 보다 관료제적인 분위기가 풍겨야 한다. 소비에트의 냄새가 나도 좋다. 이 물질과 저 용액을 섞어 펑 터뜨리는 대신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든 격자 안에서 손깍지를 껴야 한다. 굳이 뭔가를 만든다면 매일의 공정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쪽에 가깝다. 잘 풀리면 하루키처럼 될 것이나 다분히 기계적이기만 한다면 수용소의 노역과 다를 바가 없다. 음, 지금 MBTI에 과몰입하고 있는 이는 누군가 싶다.


'바라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질문에 응하던 때에서 조금은 더 성숙해졌으니 '바라는 나'와 '지금의 나'의 괴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여행을 예로 들자면 나는 내가 굉장히 자유로운 여행자라고 생각했다. 그곳은 현실이 아니니 현실적인 나를 내려놓고, 내키는 대로 흘러가는 방식의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롭고 즉흥적인 사람이 여정을 요약한 여행 노트를 들고 다니진 않았을 거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껏 나는 하루에 한 가지만 하는 느긋한 여행을 해 왔다. 여기까지 와서 꼭 들려야 한다는 곳들에 발도장 찍으며 바삐 다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하루에 하는 한 가지는 내 여행 목록에 이미 속한 것이었으니 즉흥적인 여행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매일 아침 무작위로 카드를 뽑는 식이었지만 사실 카드 한 벌의 모든 패가 머릿속에 있는 셈이었다. 퀸을 뽑으면 퀸에 어울리는 여정이 펼쳐지고, 다이아몬드 3을 뽑으면 그에 알맞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자유롭고 즉흥적이고 싶어서 미리 피똥 싸게 계획표 만드는 사람, 그게 나였다.


그러니 뭉뚱그려 떠다니던 상상들이 달력 안에 차곡차곡 들어올 때면 떠나기도 전 마음이 흡족해졌다. 가고 싶은 곳들의 휴무일과 무료입장일을 체크해 적절히 안배하고, 근처의 식당들을 찾아 평점과 후기를 읽어본다. 마음에 드는 곳은 저장을 한 뒤 카테고리에 맞는 아이콘을 붙여준다. 그걸 모아 구글맵에서 '내 지도'를 만든다. 스케치북 달력과 노트북을 동시에 펼쳐놓고 여기저기를 누비다 보면 '내 지도'도 덩달아 빼곡해졌다. 그건 꼭 여행 안내서에 나오는 명소들만은 아니었다. 숙소 근처의 전통시장, 중대형 마트, 24시간 여는 편의점. 가볍게 끼니를 때울 까페나 더위나 비를 피할 수 있는 실내 공간 같은 보다 실용적이며 사소한 아이콘들이 색색으로 빛났다. 시차 적응도 가방 단속도 없이, 땡볕 아래 의미 없는 부채질을 해가며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싶다는 건데?' 하며 날 선 목소리로 말다툼을 주고받을 일도 없이, 익숙하고 친숙한 내 집 식탁에 앉아 여행 계획표를 다듬는 일은 그래서 즐겁다.


오래 빠져든 탓에 한쪽으로 꼬았던 다리를 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트레칭도 한다. 내 굽은 어깨와 전진하는 거북목은 이미 모니터 속을 헤집고 있다. 2차원의 좌표 위에 실재하는 우리가 겹쳐지며 어떤 시간이 만들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구글맵의 로드뷰 덕에 나는 이미 그곳 골목에 서 있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언제나 실제가 상상보다 진짜답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언제나 실제가 상상보다 진짜답다.' 는 이 말,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유효할까? 우리가 가방을 이고 지고 이역만리로 날아가는 경험은 언제까지 의미 있는 일일까?



이전 06화카르멘 같은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