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바로 K-어린이집
MBTI의 j, 아니 J유형이니 나는 이만큼이나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어, 라는 지난 글을 써놓고 은근히 뿌듯하여 일주일을 잘 흘려보냈다. 앞으로의 계획을 순조롭게 계획했다는 것에 지나치게 만족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딱 일주일이 남았다. 계획형 인간의 뇌에 주황색 등이 켜지는 순간이다. 지금껏 큰 덩어리로 구획해 놓은 일정들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고, 필요한 준비물들을 점검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정보와 구해야 하는 정보를 확인하고 각종 요구들 사이 세밀한 조정도 이어가야 한다. 한 달 살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일주일 여행이면 필요한 짐의 개수 자체가 줄어든다. 일 년을 살러 간다면 그곳에서 사서 쓰다 팔거나 나눠주고 올 짐들이 있을 것이다. 일주일보다 길고 일 년보다 짧은 시간, 그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안 가져가면 아쉽고 가져가기엔 고민이 되는 물건들 사이에서 가방을 잘 꾸려야 한다. 8절 스케치북을 다시 펴서 여행 참가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필기하듯 작은 글씨로 썼음에도 꽤 줄이 길어졌다.
후시딘에서 시작해 밴드와 부루펜을 거쳐 체온계와 챔프시럽까지 이르는 끝도 없는 상비약 항목은 꼬마를 위한 것이었다. 입원할 만큼 크게 앓은 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될 일이었다. 마침 때가 되어 일본뇌염 3차 예방접종도 마쳤다. 유행한다는 수족구에 옮을까 무서워 가고 싶은 수영장도 자제하였다. 타이레놀과 프로폴리스, 그리고 항히스타민제는 나와 달을 위해 챙겨야 한다. 잠자리의 소음과 빛에 예민한 나는 수면용 이어폰과 안대도 가져간다. 오래 사용한 나의 안대는 적당히 낡아 더욱 믿음직스럽다. 없으면 절대 안 되기에 안대는 낡은 것 하나, 새것 하나 이렇게 두 개 챙겼다. 역시 J다.
먹거리의 항목은 보다 세세하다. 그간의 여행에선 캐리어의 완충재로 라면과 햇반을 담았다. 내 몸과 정신에서 유일하게 애국적인 곳이 있다면 그건 혀일 것이다. 이국에서의 새로운 음식에 환호했다가도 며칠이면 그리운 맛을 찾아 칭얼거렸다. 햇반을 데워 대충 부친 계란후라이를 올리고 거기에 튜브형 고추장을 쭉 짜내 비비면 그리움이 조금 잦아들었다. 컵라면은 한 젓가락 들어 올리기도 전 본격적인 향기로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밑바닥이 다 보이도록 짜고 매운 국물을 들이켜면 아, 살았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엇이 나를 죽이고 무엇이 나를 살리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골목을 떠돌다 한국의 맛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은 리스본, 커다란 뚝배기에 새우나 조개, 문어 같은 해산물을 넣고 걸쭉하게 끓여낸 일명 해물밥이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에그타르트나 포트와인처럼 현지 이름이 엄연히 있겠으나 대충 해물밥이라 말하면 누구나 척 알아먹을 그런 음식으로, 적당히 짜고 알맞게 칼칼한 게 여행자의 입에 딱 맞았다. 한 숟가락 뜨고서 우린 와! 이 맛이다! 하며 감탄했다. 저기 부엌에서 남도 출신의 사장님이 '김치 더 줄까?' 하며 나올 것 같은 맛, 그 맛에 감동한 나머지 나는 진지한 뻥을 치고야 만다. '있잖아. 최불암이 진행하는 한국인의 밥상 알지? 거기 해외 특별편에 이 가게 나왔잖아. 저쯤 자리에 앉아서 먹었던 것 같은데.' 달은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 말을 믿는다. 급조한 뻥에도 홀랑 넘어갈 만한 맛이다.
그런 향수에 젖어들 때 나는 지도를 샅샅이 살피며 어디든 누빌 자신이 있으나, 엄마와 꼬마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래도 매 끼니 알맞은 식당을 찾아 줄을 서고 메뉴판을 해독해 적절한 음식을 시켜 잘 먹인다는 게, 내게는 제일가는 미션으로 느껴진다. 물론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을 지도에 저장해 두었지만 실전에서 얼마나 활용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엄마와 꼬마를 급한 허기로부터 구해내는 게 일종의 사명처럼 느껴져 나는 마트의 간편식 코너를 계속 맴돈다. 끓는 물만 부으면 스프도 뚝딱, 국도 뚝딱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볶음 고추장과 소포장 김치, 대용량 조미김도 한 봉지 집어든다. 컵라면도 번들로 담는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고 말끝을 흐리며 나는 준비물 항목에 당당하게 압력솥을 써넣는다. 브리타 정수기도 써넣는다. 그 옆에 괄호를 치고 '필터'라고도 쓴다. 마인드맵을 하듯 필터 옆에 '보리차'도 적어 넣는다. 그러니까 나는 바르셀로나에 가서 정수기로 받은 물로 쌀을 씻어 솥에 안치고 보리차를 우려 냉장고에 넣어둘 작정이다. 아무래도 가까운 시장에서 장을 봐서 지지고 부치고 끓여 밥상을 차릴 모양이다. 작은 병에 간장도 참기름도 담아가면 참 요긴하겠다 생각하다가도 일이 너무 커지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즉, 한 달 살기에 대비하는 자세는 언제나 작고 조심스런 한 마디, '혹시 모르니까...' 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고스란히 집을 옮겨간다면 그게 무슨 여행이라 할 수 있을까. 어두운 밤 불을 켜지 않아도 어느 벽장 어디 서랍 몇 번째 칸에 밴드와 연고가 있는지 알고, 냉장고에 든 것으로만 몇 끼를 차릴 수 있는 익숙한 이곳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파리의 세탁기 앞에서 번역 앱을 켜고, 포르투의 유제품 선반 앞에서 옆 사람 장바구니를 흘깃 훔쳐본다. 출발 일주일 전, 켜켜이 들어찬 준비물 목록을 살필 수 있는 것도 여러 번 여행 가방을 꾸리며 쌓은 시행착오 덕이다. 모자라고 부족하고 허술한 구석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으니, 새로 장만한 커다란 캐리어에 이것저것 채우다가 나 모르는 실수도 하나쯤 굴러들어가길 바란다. 이번 여행엔 거기에 새로운 체념 하나 얹었다. 빨래집게부터 요가링까지 별별 것을 다 챙긴다 한들 내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져갈 수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내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 그건 어린이집이다. 그냥 어린이집 아니고 K-어린이집.
출생신고 후 제일 먼저 할 일은 어린이집 대기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고된 인내 끝에 들어가게 된 어린이집은 놀라운 곳이었다. 한국의 국공립 어린이집은 아침나절부터 오후까지 꼬마를 돌봐주는 곳에 그치지 않는다. 가벼운 오전 간식부터, 밥과 국, 세 가지 반찬이 나오는 급식과 낮잠 자고 일어나 먹는 오후 간식까지 영양 맞춘 먹거리가 넘치는 곳. 그리고 매일의 식단 사진과 꼬마의 상태를 상세히 적어 알림장 앱에 올려주는 선생님이 계시는 곳. 매주 놀이계획표에 따라 다양한 실내외 활동이 전개되는 곳. 식판 위로 손이 먼저 뻗어나가던 꼬마가 어느새 능숙하게 포크질을 하게 되고, '맘마 먹고 코 자고 일어나서 간식 먹고 딩동딩동 하면 엄마 오세요.' 라고 하루의 일과를 줄줄 읊기까지, 한 마디로 작은 짐승의 사회화를 돕는 이곳. 어린이집을 가져갈 수 없는 한, 내 여행은 여행이 아니며 장소만 바꾼 육아라는 것을 희미하게 예감하며 마지막 가방을 점검한다. 아무래도 공진단을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