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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 적립 여부를 다시 확인한다. 오고 가는 비행기에서의 식사 메뉴도 미리 선정한다. 캐리어 당 20kg이 넘도록 짐을 꾸린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것 같으나 정작 온라인 체크인은 하지 못하는 것, 그게 꼬마와의 여행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고 수선스럽고 어딘가 동동거린다.
그러나 공항만은 좋다. 너무도 좋다. 오랜만에 찾는 이곳, 넓고 높고 쾌적한 공간. 한여름의 끝자락이라 생각보다 인파는 많지 않다. 모두 성실히 마스크를 꼭꼭 동여매고 있지만 부직포 사이로 들어오는 냄새조차 반갑다. 막 튕겨 나가기 직전의 설렘을 달고서 공항 곳곳을 맴돈다. 살 마음도 없으면서 괜히 썬글라스 매장도 들어가 본다. 많은 사람의 손을 탄 렌즈는 적당히 얼룩져 있다. 거울 속 모습을 확인하기 이전 손을 씻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세계를 훑고 간 역병 이후 내 마음은 많이 작아져 있다. 일찌감치 이 병이 우리 집 문지방을 타 넘어 일주일 호되게 앓았음에도, 수많은 타인들 특히나 머리색과 피부색, 눈동자 색이 다른 이들이 모여드는 곳에 오니 살짝 긴장이 된다. 이런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벽을 높이 세우고 감시를 삼엄하게 만들었음에도 그렇다. 강을 건너고 산을 건너 다시 사막을 지나고 바다 위를 날아 도착할 그곳에서 나와 꼬마가 그런 눈초리를 받지는 않을지.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것도 꼬마와의 여행이다. 나는 언제나 작아지고 아무 때나 물러진다.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기에 더 잘 포착될 약점이다.
그래서 장거리 비행이 처음인 꼬마가 '귀가 아파요.' 하며 울먹거릴 때 나는 허겁지겁 생수병 뚜껑을 딴다. '물 마시면 귀가 안 아플 거야.' 이런 속삭임은 시간을 거듭하며 더욱 진해진다. '이거 먹으면 맛있겠다.' 나는 빵조각에 버터를 발라 내밀고 꼬마는 그걸 낼름낼름 받아먹는다. 몇 점의 과일과 닭고기 조림도 그렇게 넘긴다. 흰 테이블보 위엔 빵가루가 흩어지고 버터 묻은 나이프는 접시 위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다. 호기로운 마음으로 주문한 샴페인을 음미할 새도 없다. 그저 기포 담긴 알콜처럼 느껴질 뿐. '피니쉬?' 물어오면 '피니쉬, 땡스.' 라고 답하며 여러 개의 접시를 차례로 물린다. 내 눈은 자꾸 기내 화면을 따라가지만 영화며 미디어는 둘러볼 새도 없다. 언제나 화면 위를 메우는 것은 현재의 비행 정보로, 넓디넓은 대륙 위 한 점 비행기의 위치를 반복해 알려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다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숫자만 잠시 내 흥미를 끈다. 도착지까지 남은 마일과 함께 뜨는 것은 메카까지의 거리, 역시 중동 국가의 항공사답다.
기대하며 준비해 간 스티커북은 정작 2장 넘긴 다음 접어버리고, 야심하게 꺼내놓은 조립 트럭은 잠깐 가지고 논다. 그렇지만 동봉된 장난감 드라이버를 몇 번 휘두르다 잃어버리고 만다. 비행기 좌석은 어찌나 정교하고 섬세한지 별로 만지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손을 뻗어 더듬거려보지만 굳게 다문 접합부 어디에도 드라이버는 없다. 나는 다시금 시계를 보고 잠시 절망했다가 절망하기에도 이른 시간임을 깨닫는다. 결국 어떻게든 토닥거려 재우는 데 성공한다. 꼬마의 품 안에는 매일같이 끼고 자는 여우 인형이 안겨있다.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며 자면서도 여우는 꼬마의 몸 언저리를 따라다닌다. 등에 끼기도 하고 손으로 꼭 잡고 있기도 하다. 이 높은 하늘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우와 꼬마는 집에서처럼 깊은 잠을 잔다. 한국 시각으로 새벽 3시, 경유를 위해 내려야 할 때 내 억장은 잠시 무너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낯설어 눈만 꿈벅거리던 꼬마는 공항의 밝은 불빛 아래 생기를 되찾는다. 보안 시스템을 통과하고, 24시간 열려있는 게 장점이라는 면세구역을 지나는 사이 조니 워커와 말보로의 바다에서 꼬마의 시차는 옅어지고 내 정신 역시 흐려진다. 경유 대기 시간은 약 3시간 반. 쫓기듯 옮겨 타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꼬마와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은 혼란에 가깝다. 빈 카트를 손수 끌어야 하고, 사과 주스를 달라고 했다가 이번엔 라운지의 어린이 놀이터를 들어가겠다고 한다. 흘깃 훔쳐본 그곳은 푹신한 카펫과 매우 잘 길들여진 장난감의 소굴이었다. 한 마디로 전 세계 어린이들의 타액과 바이러스의 허브 같았다. 총 40kg의 짐 속에는 각종 비상약들과 코로나 자가진단 키트도 들어있지만 그걸 섣부르게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라운지의 푹신한 소파와 컴컴한 수면실을 뒤로하고 사방을 궁금해하는 꼬마의 손을 잡고 밝은 공항 여기저기를 맴돈다. 그 덕에 금으로 칠한 낙타도 보고 번쩍번쩍한 보석과 시계들도 본다. 다음 편 탑승 알림을 보고 기대와 피곤을 짊어진 채 게이트로 향한다. 이제 타서 자고 내리면 된다.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는데 이미 잠이 깬 꼬마는 쉽게 자려하지 않는다. 억지로 눕혀 재우려 하자 결국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밖으로 나가게 해 주세요.' 란 문장 구조는 아직 어려워 '밖에 나가주세요.' 라고만 말하는 꼬마다. '밖에 나가주세요. 밖에 나가주세요.' 울음 섞인 목소리는 지중해 상공 위를 떠돈다. '지금 정말 깜깜한 밤이야. 그래서 비행기 불도 다 껐지? 다른 사람들도 다 자고 있지? 우리도 자야 해. 자고 일어나면 이제 내릴 거야. 그때 밖에 나갈 수 있어.' 나도 반복해 답한다. 컴컴한 기내 안에서 같은 마음들이 느껴진다. 제발 저 꼬마의 눈물이 그치길 바라는 마음이. 모두의 마음이 모인 결과랄까, 그나마 '밖에 나가주세요.' 에서 '토닥토닥 해 주세요.' 까지 이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해 본다. 꼭 붙은 우리 사이 어김없이 여우도 끼어있다. 좌석은 3개 샀는데 1개는 비우고 가는구나. 가물가물한 정신 너머로 몇 개의 숫자들이 일렁거리며 멀어진다.
'우리 비행기는 이제 착륙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현재 시각은 몇 시, 기온은 얼마입니다.' 이 방송은 구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이윽고 도시의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작지만 또렷하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실루엣도 보였다. 드디어 이 도시에 왔구나. 4년 만에 다시, 그리고 이번엔 꼬마와 함께. 퀭하고 기름진 얼굴 위로 기대가 번진다. 한 달 살기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