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이야기

먹고 사는 이야기

by 한량

집 앞이 시장이니 시장 구경을 한다. 제각각 특색 있는 가게들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오색영롱하기론 과일 가게가 최고다. 눈이 시원한 것은 생선 가게, 휘둥그레 해지는 것은 정육점이다. 벽에 줄줄이 매달린 돼지 뒷다리들은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쭈뼛거리면서도 나는 용감하게 묻는다. '제일 맛있는 하몽을 주세요.' 그러면 포장된 하몽들을 보여주며 설명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말은 귓등으로 흘러가기에 나는 눈치껏 추임새를 넣다 다시금 용감하게 말한다. '당신의 베스트 초이스를 주세요.' 친절한 형사의 심장, 아니 우수한 돼지의 다리를 주세요, 같은 느낌으로다가.

그래서 우리의 식탁엔 하몽이 오른다. 와인에 하몽, 맥주에 하몽, 그리고 쌀밥에도 하몽이다. 한 조각 맛보면 기름은 촉촉하게 녹아들고 적당한 짭조름함은 입맛을 돋운다. 고소하고 풍부한 향이 스르르 퍼지며 입 안은 도토리 먹는 돼지들이 뛰어노는 야생의 들판이 된다. 한 마디로 맛이 대단하다는 말이다. 대단한 것은 또 있어서 야심 차게 이고 지고 온 압력솥을 꺼내 불린 쌀을 안친 첫날, 분명 최고 화력에 맞춰 버튼을 눌렀거늘 끓는 소리도 밥이 익는 냄새도 나지 않는다. 뭐지? 하고 들여다보다 검은 상판 위 인덕션이란 글자를 발견한다. 아, 아, 아. 이거 인덕션용 솥이 아니라 작동 안 되는 거구나. 이를 어쩌지 하다 부엌 서랍과 찬장을 뒤져본다. 아무래도 가정집 부엌이 아니니 도구들이 영 허술하다. 그중에서 적당한 크기의 냄비를 하나 찾는다. 압력솥의 쌀과 물을 부어 넣고 일단 네이버를 켜 '냄비밥 하는 법'이라 써넣는다. 이럴 땐 구글보다 네이버가 믿음직스럽지. 새로 산 주물냄비나 멋진 재료들이 가득한 솥밥을 자랑하는 포스팅들을 한참 지나 드디어 평범하고 일상적인 냄비밥 하는 포스팅을 찾았다. 원리는 간단하다. 냄비에 쌀과 물을 넣고 팔팔 끓인다. 어느 정도 물이 줄어들면 뚜껑을 덮고 약불로 익힌다. 마지막은 불 끄고 뜸 들이기. 그렇지만 왠지 쌀의 양, 물의 양, 냄비의 종류, 화구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것 같다. 홀라당 다 타버리면 어쩌지? 지켜보고 있으면 되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인덕션 앞에 섰다. 곧 쌀과 물이 끓어오르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주었다. 처음에 비해 물이 많이 졸아들었다. 뒤적여보니 쌀보다 밥의 텍스처에 가까워졌다. 한 입 떠서 맛을 보니 알덴테다. 겉은 익었으나 속엔 아직 에고가 살아있는 상태. 불을 줄이고 뚜껑을 닫았다. 기다리는 동안 반찬을 준비한다. 올리브유에 토마토를 볶고 거기에 계란을 섞는다. 가져간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을 한다. 도시락용 김과 하몽도 꺼내 접시 위에 올린다. 맥주도 딴다. 포트에 물을 끓여 미소된장국 블럭 위에 붓는다. 금세 만들어진 국에는 아주 작은 크기의 두부도, 미역 조각도, 팽이버섯도 있다. 이쯤 오니 다행히 밥 냄새가 난다. 마지막 뜸을 조금 들인다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냄비밥은 성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는다. 때론 컵라면이 때론 무말랭이가 올라오기도 한다. 캔에 담긴 볶음김치도 요긴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날엔 하몽, 언제나 동네의 샤퀴테리에서 베스트 원으로 골라온 하몽이 있다. 꼬마는 잘게 찢은 하몽을 올린 밥을 좋아한다. 그건 '하몽밥'이란 고유 명사를 얻게 되었다. 우리의 입맛은 차차 섞여 들기 시작한다. 1903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레스토랑의 하이체어에서 배고픈 꼬마는 몸을 비틀며 요구하기 시작했다. '빠에야 먹고 싶어요. 빠에야 먹고 싶어요.' 라고. 그 발음이 꽤 정확해 놀라고 말았다. 어느 날의 바에선 간소한 안주로 시킨 올리브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접시 구석에 뱉어놓은 올리브 씨에 관심을 보이더니 대뜸 그걸 먹어보겠다고 한다. '안 돼, 안 돼. 이건 씨야. 씨. 못 먹어서 버리는 거야. 그럼 올리브 줄까?' 하지만 씨가 있는 올리브를 입 안에서 해체하는 기술은 꼬마에게 어려워 보인다. 하는 수없이 나는 포크와 나이프로 올리브의 살을 발라내기 시작한다. 해체한 올리브 조각을 주니 조심스레 맛을 보고 계속 달라고 요구한다. 아, 너 이 녀석. 스페인 음식이 입에 맞구나?

하여 우리의 입맛은 차차 전진해간다. 웬만한 음식은 함께 나눠먹으며 맛을 가늠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노력,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단 한 번의 급작스런 kfc 방문을 제외하고 모든 레스토랑에선 몹시 천천히 식사가 준비되었다. 특히 빠에야 같은 경우는 주문 후 나오기까지 최소 20분에서 30분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식전주 문화가 왜 생기는지, 오래오래 식사를 '즐기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나야 차가운 맥주나 샹그리아를 홀짝이며 접시를 기다리는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꼬마의 집중력엔 한계가 있었다. 처음엔 나이프나 포크를 만지며 논다. 나는 코인 티슈에 물을 적셔 열심히 노는 그 손을 차례로 닦인다. 방금까지 놀이터의 온갖 놀이기구를 만지다 온 손에선 쇠 냄새가 풍겼다. 나이프와 포크 탐색을 마치면 식탁 위의 양념들에도 관심을 보인다. 소금통도 흔들어 보고 후추 통도 살펴본다. 올리브유 병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발사믹 식초병 뚜껑도 만지작거린다. 달그락 열더니 냄새도 맡아본다. 그러더니 시큼한 냄새에 서둘러 뚜껑을 닫는다. 역시 뭐든지 경험해 봐야 아는 법이다. 냅킨 통의 휴지도 안 만질 수가 없다. 한 두어 장까진 봐준다. 벌써 조금 엎지른 물을 닦기에 요긴하니까. 이곳에서 꼬마 몫의 어린이 식기를 받은 적은 없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플라스틱 식기와 수저 같은 것 말이다. 꼬마가 시킨 오렌지 주스도 와인을 담을 법한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그걸 한 손으로 마시려는 모습에 내 마음은 다 철렁한데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혼자! 혼자!' 외치며 거드는 내 손을 밀어내는 모습이 더 위험해 보여 나는 손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 아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꼬마는 태연한 얼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스를 마신다. 컵을 무사히 내려놓는 것을 보고,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아직 우리의 주문이 나오긴 멀었다.

그래서 우리는 교대로 꼬마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섰다. 길가의 가로수를 보고, 타일 바닥의 무늬를 관찰하고, 지나는 오토바이를 구경한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싶으면 다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식사다. 느긋하고 느슨하게 흘러가는 식사면 좋으련만, 끊임없이 꼬마의 주의를 살피고 먹은 양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하려는, 사실 울며 뒤집어지는 일이 없게끔 노력하는 식사다. 넷플릭스의 뽀로로와 콩순이를 초빙하면 만사가 편하련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정 집중력이 흐려질 땐 어린이집 사진들을 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와! 어린이집 놀이터다! 선생님 손 잡고 산책을 갔네.' 하며 꿀대구와 가지구이, 해물밥을 밀어 넣는다. 상상 속의 재료와 조리법을 줄줄 읊을 때도 있었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는 초록 국수, 뇨끼는 동그라미 국수가 되는 저녁, 매 끼니가 <식객>이었고 매 순간이 <요리왕 비룡>이었다. 맛있어서 두 번째 방문한 레스토랑의 서버 할아버지가 꼬마를 보고 'I remember you.' 하고 웃을 때도 그게 안 좋은 쪽의 인상은 아닌지 살폈다. 다행히 그래 보였다. 그런 사사로운 인사와 친절 덕에 외식하는 법을 많이 배웠다. 음식을 가져다주고 꼬마가 자리에 없는 것을 안 할머니는 직접 가게 밖으로 나가 꼬마를 찾는다. 음식 나왔으니 어서 오라고.

이 여름 꼬마의 키를 키우고 조금이나마 살을 찌운 건 이런 노력 덕이었다. 그린 페퍼도, 빠에야도, 깔라마리와 파타타 브라바스도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하몽도. 육가공품은 한국 반입이 불가하기에 있는 동안 열심히 먹어두자는 전략은 옳고도 틀렸다. 반찬으로 안주로 간식으로 먹던 그 맛이 너무 그립기에 침만 꿀꺽 삼키는 오후다.


https://youtu.be/rDdQhq91V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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