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관해 생각해요

집에 관해 생각해요

by 한량

직육면체의 건물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1층이 여기에선 0층이다. 그 0층에는 대부분 상점이 있다. 슈퍼 혹은 안경점, 레스토랑이나 옷가게 등 가게들이 들어와 있다. 그 위부터는 주택인데 대략 5층에서 7층 정도까지 집들이 모여있다. 제일 꼭대기 층의 집은 건물의 옥상을 마당처럼 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옥탑방의 구조지만 여기에선 펜트하우스라 부른다. 옥상에 수영장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길을 걸으며 살펴보면 전체 건물의 높이는 비슷비슷하다. 컬러톤도 비슷비슷하다. 창문이나 발코니 디자인, 건물 공동 현관의 디테일들로 개성을 드러낸다.

Barcelona aerial view

이런 건물들이 모여 정사각형 블럭의 각 변을 형성한다. 공중에서 보면 ㅁ구조다. ㅁ의 가운데 빈 부분은 커다란 중정이자 각각 0층에 들어온 가게들의 옥상이 된다. 바르셀로나 집들은 모두 주상복합인 셈이다. 집이 어느 방향에 놓이느냐에 따라 메인이 되는 창이 중정을 바라볼 수도 있고, ㅁ의 바깥쪽 도로를 바라볼 수도 있다. 우리의 첫 번째 숙소는 중정을 바라보고 있었고, 두 번째 숙소는 도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조용한 것은 단연코 첫 번째 숙소였다. 널찍한 발코니에 앉아 있으면 3면의 집들이 모두 보였다. 1층의 집, 그러니까 중정 출입이 자유로운 집들은 0층 가게의 옥상들을 마당처럼 넓게 쓰고 있었다. 작은 수영장을 만들기도 하고 그 옆에 간이 부엌을 차려놓기도 했다. 맞은편 건물로 시선을 돌리면 널어둔 빨래나, 화분이며 테이블로 꾸민 발코니도 보였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이면 방의 불을 등지고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실루엣도 보였다. 그러나 그 거리가 꽤 되었기에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어디서 위잉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아침이면 꼬마는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묻곤 했다. '음, 이건 청소기 소리 같은데? 어느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나 보다.' 그 이후로 아침이면 꼬마는 청소기 소리가 나는지 안 나는지 확인하고 다녔다. 발코니 쇼파에 기대 티비, 아마도 축구를 보는 할아버지를 몇 번 보고 나선 할아버지가 오늘은 왜 티비를 안 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꼬마를 재운 뒤 우리는 발코니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집들에 불이 하나둘 켜졌다가 꺼지는 걸 보며 요일별 나이트 라이프에 대해 상상하기도 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다들 놀러 나갔군! 일요일 밤엔 역시 불이 많이 켜져 있네, 하며. 머무는 동안 매일 발코니에 앉아 있다 보니 깨닫는 것들이 있었다.


밖에 나가지 않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여기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정말 좋구나. 선선한 밤이면 나는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말렸다. 발코니의 벽과 천장은 존재하고 중정과 마주한 부분은 모두 트여있다. 트인 부분엔 철제 난간이 있어 위험한 느낌은 없다. 그래서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하나의 프레임처럼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이 프레임이 존재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일출과 일몰, 구름의 양과 하늘의 색깔뿐 아니라 어느 집에 어떤 불이 켜졌는지, 시시각각 좌표가 달라진다. 게다가 바르셀로나 하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비행운의 길이와 방향까지. 천장과 벽이 있으니 아늑함이 있고 날씨에 관계없이 빨래를 말리기 좋다. 물론 날씨는 거의 매일 좋지만. 이 숙소의 발코니는 제법 넉넉한 크기라 야외용 테이블 2개, 의자 6개, 모두 펼친 빨래 건조대를 놓고도 답답한 느낌이 없었다. 거기에 앉아 하루를 회상한다. 오늘 하루 꼬마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말이 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에게 서운했던 점이나 미안했던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일 어디에 갈지, 무엇을 할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두 번째 숙소의 발코니는 첫 번째보다 조금 아담했다. 테이블과 의자는 있지만 막상 나가서 오래 멍 때리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발코니에 서면 거리가 내려다 보이고 차들이 다닌다. 거리를 마주한 집의 장점은 창문을 닫고 바라볼 때 찾을 수 있었다. 눈높이만큼 자란 플라타너스가 프레임의 끝에서 우아하게 너울거렸다. 푸른 잎이 일렁일렁거리는 너머로 맞은편 건물의 발코니가 보였다. 매일 웃통을 벗은 채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어느 날 밤엔 좁은 발코니에 모여있던 여러 사람들. 펄럭이는 까딸란 깃발. 나름의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런 ㅁ모양의 블럭들이 계속해서 줄을 이어 거리를 만든다. 각 블럭 사이는 작은 횡단보도들이 있고, 그 횡단보도들엔 꼭 신호등이 있지만 그 신호는 꼭 지켜지지 않는다. 작은 폭의 도로는 사람을 용맹하게 만든다. 블럭의 길이는 성인의 평균 걸음걸이 속도에 맞춰 설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번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면 다음 신호등도 계속 초록불을 만난다는 이야기다. 대단히 인간 중심적인 도시계획이 아닐 수없다. 실제 걸어보니 내 보폭엔 살짝 빠른 감이 있다. 처음에 잘 건넜다면 그다음 횡단보도나 그 다음다음의 횡단보도에선 깜박이는 초록불에 건너게 되고, 그다음 번 횡단보도엔 빨간불에 멈춰 서게 되는 식이다. 아마도 여기서의 인간 중심은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할 테니 그럴 것이다. 각종 '평균'치에서 늘상 소외되고 있는 이야기는 다음번에 하도록 하고, 어쨌든 경쾌한 모양새로 걷는다. 블럭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장점은 길을 찾기 엄청 쉽다는 거다. 그리고 걷기에 주저함 없도록 만든다. 구글맵으로 목적지까지의 여러 경로를 살피다, 대략 몇 개의 블럭을 어떻게 지나면 된다는 걸 알면 그냥 걷기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아주 먼 곳이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씩씩하고 용맹하게 걷기 시작한다. 평지 위 블럭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선 하루 이만보씩 걸어도 걸을 만했다.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아, 여기! 아, 여기네! 하는 곳들이 있었다. 그건 가우디의 건축물도, 유서 깊은 미술관들도 아니다. 지난번 바르셀로나 원하는 조건을 설정해 메일을 받아보던 게 헛되지 않았다. 여행 이후로 줄곧 이 도시의 부동산 사이트를 구경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도시에서 멋진 동네를 찾고, 거기에 알맞은 집을 찾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도 메일은 계속 온다. 내가 '좋아요' 를 누른 매물에 새로운 사진이 업데이트되었다든지, 가격 할인이 있다든지, 추천 매물의 목록이라든지를 거듭해 알려준다. 가끔은 사진과 가격에 홀려 들어가 보면 이미 리스팅이 끝났다는 메시지가 뜨기도 한다. 역시 좋은 물건은 금세 사라지는 법. 마우스를 옮겨가며 여러 집을 구경하는 일은 즐겁다. 괜찮은 집을 만나면 한국 사람답게 남동향, 남서향 따져본 뒤 방 배치를 고민하고 더 나아가 붙박이장 여부와 기존 살림살이 배치까지 숙고한다. 당장 이곳에 집을 구해 정착할 것도 아니면서, 나는 메일함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가 맞다면 내 마음 모두 다 거기 줄게요, 날 가져요, 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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