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로 자유로운 우리
꼬마는 대략 13kg이 조금 안 되는 몸무게로 슬프거나 무서울 땐 안아주길 요구한다. 이때 안는 건 단순한 포옹이 아닌 와락 안아 드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아기처럼 안아주세요.' 라고 요청한다. 앉은자리에서 안아주려 하면 '진짜 일어나서 안아주세요.' 라고 한다. 못 들은 척하면 앵무새처럼 계속 반복해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안아주려면 안아주겠다만 이제는 꽤 무거워 안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여행을 앞두고 고민을 했다.
가져가는 휴대용 유아차를 제발 잘 타 줘야 할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집 유아차는 '요요' 로, 약 6.6kg의 무게를 지녔다. 캐노피 쪽을 한 번 접고, 의자 아래쪽 버튼을 누른 뒤 당기면 납작하게 접혀 기내 반입도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이 접고 펴는 게 영 불편했다. 접는 마지막 과정에선 언제나 낑낑거렸다. 펼 때는 늘 바퀴에 정강이를 부딪치곤 했다. 6.6kg라는 무게도 염려스러웠다. 더 가벼운 거 없을까? 하여 찾아봤더니 약 3kg대의 유아차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건 또 핸들링이 여의치 않다는 후기가 많았다. 그럼 손목이 남아나질 않겠지. 하여 집에 있던 요요를 들고 가기로 한다.
결론.
이번 여행의 공로상은 요요가 받아야 한다. 요요가 없었다면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요는 어떤 돌길도 다 헤쳐나갔다. 어느 경사도 잘도 오르고 내렸다. 규칙적인 타일 바닥 위를 한참 걸을 때면 달달달달 부드러운 진동을 선사해 꼬마를 숙면으로 이끌었다. 꼬마는 요요에서 간식도 먹고 물도 마시며 탑승을 즐겼다. 또한 요요에 앉아 많은 것을 관찰했다. 숙소에서는 종알종알 계속 떠들던 꼬마가 건물 밖을 나서면 조용해졌다. 나름대로 볼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거리 돌바닥의 무늬도 살피고 길가 쓰레기통의 색깔도 본다. 맞은편에서 오는 유아차를 만나면 스쳐간 후에도 고개가 따라가기도 했다. '저 아기는 왜 울어요?' 내가 가끔 꼬마에게 묻고 싶은 질문도 하면서.
요요가 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의 바퀴 친화적인 설계 덕분이다. 한 달 살기를 하며 요요가 거추장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어 투 도어의 모든 단계에서 바퀴를 위한 장치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그 많은 횡단보도는 모두 경사로를 지니고 있었으며 경사로의 길이는 길고 각도는 낮아 완만하게 오르내릴 수 있었다. 어느 건물의 진입로에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구엘 공원의 경우 유아차나 휠체어가 오면 직원이 따로 문을 열어주며 경사로를 안내해 주었다. 지하철은 지상의 엘리베이터를 찾아 내려가면 문이 열리는 곳 바로 옆이 개찰구였다. 개찰구를 지나 다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이번엔 플랫폼으로 바로 직결되었다. 우리는 그냥 오는 열차에 올라타면 되었다. 여기까지는 부러움을 조금만 티 낼 수 있었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버스였다. 정차한 버스 뒤편의 문 앞에서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 저상 버스 위로 오른 유아차는 여기저기 눈치 보며 맴돌 일 없이 바로 문 옆의 유아차, 휠체어 지정 자리로 향하면 된다. 이 자리의 가장 좋은 점은 의자 없이 비어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앉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해 하지 않고 편히 유아차를 세워놓을 수 있었다. 주변엔 안전 바와 쿠션 장치가 된 등받이가 있고 유아차에 고정할 수 있는 벨트와 낮게 자리한 하차벨도 준비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접이식 의자가 있어 보호자가 앉을 수 있다. 접이식 의자를 접으면 이 공간은 더욱 넓게 사용할 수 있다. 유아차를 세로로 놓는다면 두 대, 가로로 놓는다면 서너 대는 거뜬히 들어갈 공간이다. 게다가 이런 자리가 버스에 두 군데는 있다는 거다. 앞 뒤를 연결한 긴 버스의 경우는 네 군데일 것이고. 붐비는 버스에선 여기에도 당연히 사람들이 서 있지만 유아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바로 자리를 내어주었다. '죄송한데 저 좀 탈게요.' 같은 말은 할 것도 없거니와 '아이씨, 무슨 이런 시간에 애를 데리고 나와?' 같은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다. 나는 그런 눈총이 두려워 서울에선 유아차와 함께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었다. 경험하기 전에 이미 주눅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장면을 상상해 보자. 버스 정류장에 서 내가 타려는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정차하고 나는 뒷문으로 올라탄다. 그다음부터가 공백으로 남는다. 어느 공간에 유아차를 세우지? 유아차의 브레이크를 건다고 해도 버스에 고정할 곳은 마땅찮아 보인다. 아마 어느 기둥 가까이 세워두고 내 몸으로 막아서야 할 것이 분명하다. 차체의 흔들림이나 급정거엔 속수무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이건 사람이 없을 때의 가정이고, 모두 자리에 앉아있거나 더 나아가 '혼잡' 상태의 버스라면 나와 유아차는 불편을 야기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건 내가 지금껏 버스에 탄 휠체어를 본 적 없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이다. '왜 나와? 왜 나와서 바쁜 나를 불편하게 해? 좀 한가한 시간에 타면 안 되나?' 같은 이유들.
버스 요금을 내지 않는 꼬마가 요금을 내는 성인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함에도 그것이 아무렇게 않게 용인되는 도시. 하차벨이 궁금해 눌러본 꼬마에게 '이건 내릴 때 누르는 버튼이란다. 하지만 노 프라블럼이야.' 라고 알려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는 도시. 그 덕분에 우리는 종으로 횡으로 내키는 대로 버스를 잡아탄다. 그 사이 꼬마는 등받이 쿠션이 다리미판 같다며 맨손 다리미질을 해대고, 안전벨트를 스스로 채우고 풀 정도의 손가락 힘을 기른다. 생전 처음 타 본 버스가 익숙해지니 '이제 몇 정거장만 가면 내리네.'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게 된다. 앞자리의 형아가 나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할 때 부끄러워 아무 소리나 하다가도 내릴 때가 되면 '아디오스.' 라고 인사하게 되었다.
이 도시의 아이러니들은 계속 이어진다. 엘리베이터의 유리창은 깨져있지만 유아차와 휠체어 엑세스는 더없이 편리한 지하철. 낡았지만 쓰레기 한 점 없는 거리. 그 이유는 아마 무수히 많은 쓰레기통과 그 수만큼 존재하는 듯한 청소부와 청소차들 덕분이다.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릴 때마다 나는 쓰레기통을 발견했다. 쓰레기통 안엔 하나같이 짙은 회색의 비닐이 단정하게 씌워져 있었고, 절반 이상 쓰레기가 찬 쓰레기통을 본 적은 없었다. 아마 계속해서 도시를 누비는 청소부들이 즉각 수거해가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차의 종류도 다양해서 물을 분사하며 먼지를 청소하는 차부터,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가는 차, 날렵하게 얕은 턱을 타고 올라타 인도를 청소하는 작은 차들도 있었다. 바퀴 달린 것들을 좋아하는 꼬마는 청소차를 만날 때마다 넋이 나갔다. 형광 녹색의 조끼를 입은 청소부들은 성별과 노소를 무관하게 만날 수 있었고 사실 그래서 더 멋져 보였다.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로서 사랑 농도가 진한 필터를 빼고 보더라도 멋진 건 멋진 거였다. 더러운데 깨끗하고 낡았는데 말끔한 도시, 거기엔 가장 약한 사람들을 위한 장치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동시에 지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평범한 길거리임에도 유아차와 함께 나뒹굴 뻔해 손목이 꺾이도록 잡아채야 하던 서울, 쓰레기 하나 버릴 곳이 없어 손에 쥐고 돌아다녀야 하는 나의 도시. 언감생심 유아차와 함께 버스는 바라지도 않거니와 지하철 타기 전에도 심호흡을 많이 해야 했던 나의 고국. 날아드는 눈총, 무례한 언사와 치켜드는 카메라가 겁나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곳에서 많이 해 본다. 용감한만큼 행복해지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