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가리가에 가리라
핸드폰 알림이 울릴 때 잠시 피식 웃게 된다. 가족들의 메시지나 친구들의 연락 말고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광고 알림 같은 것을 볼 때 그렇게 된다. 수익률 확실 보장 어쩌고 하는 스팸 메시지도, 직접 메신저에 추가해 놓은 가게들에서 날아오는 광고도 그렇다. 귀 쫑긋하고 기다리던 당근 마켓의 키워드 알림도 마찬가지다. 꽤 좋은 상태의 물건인데? 가격도 괜찮고? 서울에서였다면 바로 '저요!' 라고 손 들며 메시지를 보냈을 텐데(괜히 예의차린답시고 '안녕하세요? 제가 구매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보냈다가 순위에 밀려 놓친 적이 몇 번 있었다.) 여기서는 그냥 눈으로 보다 말아버린다. 지금 산다고 해도 바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갈 날은 아직 멀었으니 그때 필요하면 사자. 이런 느긋한 마음이 되는 거다. 이럴 때 나는 스스로를 우주인처럼 여기고 있다. 지구를 떠나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우주인. 저 멀리 창백한 푸른 점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는지 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원래도 늘 바쁘던 곳이었으니 아마 내가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로 돌고 있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어디에도 얽매일 것 없이, 중력의 영향 하나 없이 두둥실 부유하고 있는 우리. 한 달 살기의 장점은 이런 것에 있다.
짧은 스페인어를 더듬더듬 내뱉지만 눈총 받은 적은 없다. 이내 영어로 바꿔 이야기하면 되니까. 그 의사소통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을 때면 그냥 하하 웃고 말거나, 구체적인 사진이나 그림을 보여주면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영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상냥했다. 온화한 기후 속 마음 편히 사는 이들이라 그랬겠지만 사실 우리가 돈을 쓰러 간 입장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여행자는 때론 귀찮거나 딱하거나 짜증나거나 바보 같아 보이지만, 핵심은 돈을 쓰기 위해 온 사람이다.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선 환영 안 할 리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부드러운 환대 앞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로 임하기만 하면 된다.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눈치껏 넘겨짚으면 된다. 급작스런 삿대질로 넘어가거나 누가 옳고 그른가 따지기 위해 씩씩거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금 지구 아닌 그렇다고 다른 행성도 아닌, 우주에 떠도는 여행자로서 느끼는 얕은 자유가 느껴졌다. 어느 곳에도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어디에도 약간 열외 되어 있는 그런 사람.
그래서 하룻밤을 위한 짐을 꾸리며 나는 이런 이야기를 물어보겠다고 결심한다. 이곳에 돈 쓰러 온 여행자도 배움을 위해 정진하는 학생도 아닌, 돈 벌며 세금 내고 애 학교 보내는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것도 회사에 소속되어 매달 월급 받는 거 말고, 자기 이름 걸고 자영업 그것도 요식업으로 돈 버는 일이라니. 궁금한 건 엄청 많았다.
우리가 구기동으로 이사 간 것은 딱 서른 살 때였다. 신혼을 시작한 원서동에서 인왕산 뒤로 자하문 지나 부암동 거쳐 북한산 기슭까지 올라가야 했으나, 같은 종로구란 이유로 가까워 보였다. 심지어 구 안에서 지역에 따라 나뉘던 쓰레기봉투도 청운효자동, 구기동, 평창동, 원서동 등이 같은 구역이었으니 이사를 준비하며 부엌 서랍을 비울 필요도 없었다. 산 아래 작은 두 집이 벽을 맞대고 사이좋게 선 곳, 우리는 왼편의 노란 대문에 살았다. 땅을 사고 터를 다지고 집을 지은 민아언니네는 오른편 빨간 대문에 살았다. 두 집은 대문 앞 주차장을 나눠 쓰고, 거실 창 앞의 마당을 나눠 썼다. 야트막한 담이 있었지만 사실 어느 집에서나 이 담 저 담을 다 넘겨볼 수 있었다. 언니네 마당엔 감나무가, 우리 마당엔 벚꽃 나무가 있었다. 벚꽃은 산 아래보다 정확히 2주 늦게 피기 시작해 2주 늦게 저물었다. 마당이 있고 공간 활용에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3층 집에 사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해 처음으로 독립출판물을 만들었다. 책을 만든 김에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다 초청해 이틀 꼬박 파티도 했다. 잔칫집답게 시루떡부터 온갖 종류의 술, 케익과 주전부리들이 계속 등장했다. 당연히 코로나 같은 것은 없었으며, 시간은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크게 틀어둔 음악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 오며 가며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르고 경품 추첨도 한다. 그들은 일요일 밤이 깊어서야 떠났다. 모두 주택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집을 구했어요?' 그 질문에 답할 때마다 나도 언니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멋진 집을 지었어요?' 라고. 가끔은 서로의 집에 초대해 저녁을 함께 먹기도 했다. 조용한 한낮이면 벽을 타고 넘나드는 소리도 들렸다. 주로 민아언니가 두 아이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 사이로 동네 고양이들이 나른하게 울고, 건너 건너 먼 집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없이 그러니까 거리낄 것이나 얽매일 것 없이 사는 우리 둘과 달리 언니는 애들을 키우며 여러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한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 그러면서 본인의 일은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 그렇게 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훌훌 떠났다. 이역만리로 언니가 떠나고 나는 도서관에서 몰타에 관한 책을 빌려보았다. '언제 한 번 놀러와!' 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도 여전히 시간이 많던 우리는 몰타로 떠난다. 함께 요트를 타고 와인과 수박을 먹은 다음 바다에 뛰어든다. 그다음 해는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타파스를 먹고 분수쇼를 본다. 그 무렵 언니는 둘째의 학교 고민을 한참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학교도 동네도 정했다며 이사 소식을 알려왔다. 그러더니 그만 그 동네에서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다는 소식, 더 지나선 가게를 새로 확장했다는 안부까지 전해왔다.
언니는 원래 칼을 만지고 불 앞에 서던 이가 아니었다. 전공은 외국어에 직업은 회계사로 평생 숫자와 수식을 지지고 볶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이가 바르셀로나에서 레스토랑을 열다니? 아니 갈 수 없었다. 이미 구기동의 그 집을 떠난 지는 한참, 더 이상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도 아니건만 언니와 나는 종종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함께 글을 써 왔다. 크고 작은 고민들을 툭툭 나누며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우정과 애정 같은 게 뭉근하게 오래 끓은 사이라고 하면 될까. 그리하여 우리는 복잡한 까딸루냐 광장에서 눈치껏 차표를 끊고 쇳소리가 거침없는 플랫폼 의자에 앉아 언니의 동네, '라 가리가' 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 주소로 찾아오면 돼. 내가 없을 수도 있으니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공동 현관문은 열어놓았어. 계단 올라오면 우리 애 구두가 보일 거야. 오른쪽 구두 안에 현관문 열쇠 있다. 이따 보자!' 이런 문자는 오랜만의 만남을 모험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 내 어디 한 번 제대로 구두를 털어주리라. 달이 맨 커다란 가방 안엔 하루치의 짐이 들었다.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 꼬마가 안고 자는 인형들과 가장 중요한 기저귀까지. 다행히 집에서 까딸루냐 광장까지 가는 길에 꼬마는 깊이 잠들었다. 후덥지근한 플랫폼, 여러 대의 기차가 오고 가는 사이에도 뒤척임 하나 없다. 도심을 벗어나 기차는 지상으로 올라와 달리기 시작한다. 건물의 빈도가 뜸해지고 야트막한 능선들이 겹쳐진 채 물러난다. 규칙적인 기차의 진동, 조용한 차내. 오늘 엄청 잘 자네, 라고 생각하자 말자 눈을 뜨는 꼬마다. 다행히 얼마 후면 라 가리가 역에 도착한다. 우리는 내릴 준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