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을 위해
'에어컨이 있어요?'
문을 열어주며 반기는 민아 언니에게 대뜸 던진 꼬마의 질문이었다. '응? 에어컨? 우리 집에 에어컨은 없어.' 하며 웃는 언니. 4년 만의 만남이다. 그 사이 언니에겐 이사와 창업이, 나에겐 출산과 육아가 있었다. 무엇보다 머리 위 진하게 그늘을 드리운 코로나도. 그 시간을 무사히 지나옴을 축하하며 인사를 나눈다. 내어주는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꼬마는 집 구석구석 순찰을 돈다. 언니에게 '너 살림 점검 나왔니?'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덕분에 꼬마를 따라다니며 나도 집 구경을 한다. 서늘한 타일 바닥과 높은 천장, 벽난로 옆엔 잘 동여맨 장작더미도 있다. 커다란 창엔 나무로 된 덧창도 붙어있다. 거실의 창을 열면 마당의 나무가 덥석 끼어들고, 복도 건너 다이닝룸의 창 너머론 동네가 내려다보인다. 더 멀리론 산도 밭도 하늘도 보인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욕실, 중후한 느낌의 고가구들, 간소한 살림이 어우러져 이건 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잖아? 하게 된다. 꼬마는 신이 나서 온 집안을 돌아다니다 벽난로 옆 다이슨을 발견하곤 슬쩍 묻는다. '아모나, 청소기 만져봐도 돼요?' 이윽고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만져봐도 되지. 근데 그거 고장난 거야.'
'아모나' 는 꼬마가 언니를 부르는 말이다. 어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아줌마와 이모를 더한 말일까? 아모나, 아모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 동네와 이 집과도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3주 간의 휴가를 마치고 마침 오늘이 레스토랑의 문을 다시 여는 날임에도, 언니는 집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메시지 보내준 대로 구두 뒤져서 열쇠 찾아도 되는데. 바쁜 와중에 우릴 맞이한 후, 언니는 저녁 영업을 위해 나가봐야 한다. 그렇다. 8시에 영업 시작이지만, 사장님은 늦은 오후에 출근을 해야 하는 것. 이게 자영업이지. '그럼 저희는 동네에서 놀다가 8시에 가게로 갈게요.' 하니 '8시 반에 와!' 라고 한다. 서울에서 8시면 이미 저녁 식사와 꼬마의 목욕을 다 마쳤을 시간이다. 내복 차림으로 뒹굴뒹굴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영상 통화를 하거나, 장난감 가지고 조금 놀다 9시가 되면 자러 가곤 했다. 그러던 우리의 저녁도 스페인 스타일에 맞춰 차차 늦어지고 있다. 8시쯤 저녁을 먹으니 집에 돌아오면 9시 반, 목욕 후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 10시는 그냥 넘긴다. 하루 일과표의 구성은 비슷한데 뒤로 껑충 이동한 셈이다.
짐을 풀어놓고 우리도 동네 탐방에 나선다. 우리가 내린 기차역 아래로 굴다리를 건너면 시내인 모양이다. 굴다리를 건너자 구글맵을 들여다볼 것도 없이 바로 놀이터가 나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유아차에서 내려 잠시 놀고야 만다. 흙을 모아서 쏟아붓길 여러 번, 손과 운동화까지 탈탈 털고 다시 길을 나선다. 여긴가? 여기? 하며 골목을 몇 개 지나고 나니 마을의 광장이 나온다. 오붓하게 몰려있는 까페들과 너른 공터. 동네 사람들 다 여기 모여 있었구만 싶게 이른 저녁 모여 앉아 술과 커피를 마시고 있다. 동네 아이들은 비둘기를 쫓아다니며 놀고 있다. 어딜 가나 까페를 겸한 바르가 있고, 그 앞엔 파라솔과 탁자가 있다. 그리고 아무 시간에나 앉아 홀짝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분 좋게 취하는 정도고 인사불성이 되어 비틀거리거나 고꾸라지는 이는 보지 못했다. 일상의 곁에 늘 술이 찰랑거리고 있지만 그 속에 잠겨 빠져 죽지는 않는 분위기. 여기서도 애들은 뛰어놀고 어른들은 그 옆 까페에 앉아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있다. 안주 삼아 가벼운 식사들을 하면서. 나야 평범한 저녁 반주로 녹아드는 이런 분위기가 몹시 좋으니 찬성 백 개다.
가볍게 목을 축인 후 동네 꽃가게로 향한다. 난 화분을 골라 선물용으로 포장해 달라고 하니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묻는다. '혹시 민아의 가족인가요?' 그렇다. 언니는 이미 이 동네의 유명인사다. '우리는 민아의 친구입니다. 민아를 만나러 왔어요.' 언니와 잘 아는 사이라는 누리아 씨는 화분을 예쁘게 포장해주었다. 가게를 나서며 보니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나 보다. 문 앞에 꺼내놓은 화분들을 들여놓고 퇴근 준비를 한다. 이제 다들 저녁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우리도 언니의 가게를 찾는다.
아까 봤던 아모나가 왜 저기 있는 것일까? 날렵하고 잽싸게 화구 앞을 오가는 언니를 보며 꼬마는 '아모나, 빨리 오세요.' 한다. 언니는 우리에게 작업대 바로 앞인 바 자리에 앉으라 한다. 여기가 Vip 석이라며. 이런 곳에 왔으면 또 주방장 특선 요리를 먹어야지. 알아서 주세요. 저희는 다 잘 먹습니다. 라고 말하자 샐러드부터 야끼소바, 돼지고기 덮밥과 3가지 종류의 초밥, 맥주까지 일사천리로 척척 나온다. 우리는 거듭 감탄하며 접시를 비운다. 꼬마는 '맛있어요! 참 맛있어요!' 라고 연발하는 통에 언니에게 이거 너무 연습시킨 것 아니냐는 의혹도 받았다. 그럴 리가요. 진짜 맛있는 저녁이었다고요. 꼬마와 함께 하는 외식에서 나는 언제나 살짝 긴장하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았다. 마음 편하게 맛을 음미하며 배불리 먹고 나섰다. 특히나 야끼소바는 어떻게 이런 맛을? 싶을 정도로 정말 맛있었다. 볶은 양배추와 당근의 조합도 아주 좋았다. 배부른 우리 등 뒤론 손님이 가득 찼다. 평일인데? 와, 정말 여기 잘 되는구나. 너무 기쁘다. 좋다. 하며 밤거리를 걷는다. 보름에 가까운 달이 떠 있다. 종일 열심히 놀고 밥도 많이 먹은 꼬마는 목욕 후 순조롭게 잠이 든다. 얼굴에 직접 닿지 않도록 선풍기만 살짝 틀어놓고 나와 우린 속닥거리며 논다. 정말이지 에어컨은 없어도 되는 동네다. 공기가 맑고 달아 우물물에서 길어 올린 약수 같았다.
늦게 퇴근한 언니는 토마토와 치즈, 아몬드와 와인을 꺼내온다. 이거 맛이 있으려나? 하고 딴 와인은 청량감이 넘쳤다. 서늘한 공기와 찹찹한 바닥. 그리고 입 안엔 구슬처럼 굴러오는 청포도의 향.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구기동이 멀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 우리가 한 선택들. 새로운 도전과 지난 후회들. 아이를 키우며 달라진 삶에 대해서도, 이제는 다 큰 아이들과의 관계 이야기도 나눌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가게 확장하면서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스페인 세무서와 따박따박 따져가며 일을 처리한 언니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 모든 게 매일 도시락을 싸서 보낸 둘째 덕에 일어난 일이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친구들 앞에서 적잖이 긴장했을 아이.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열 때마다 반 친구 모두가 모여들곤 했다. '와! 정말 맛있어 보여. 너희 엄마 요리 대단하다!' 그 열정이 창업에까지 이르게 되다니 역시 언니는 참 대단하다. 이제는 여기 라 가리가에서 언니 가게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계절에 맞는 재료들로 정성껏 만들어내는 언니만의 오마카세. 예약을 해야 하고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가게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밤은 잘도 흐른다. 피곤한 언니를 너무 오래 잡아두는 것은 아닌지?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다. 적당히 마시고 남길 줄 알았던 와인도 한 병을 다 비웠다. 그런데 다음 날 숙취는커녕 머리는 맑고 개운하기만 해, 이건 이 싱그러운 공기 덕이려니 했다. 태백이나 영월쯤이면 이런 느낌일까.
언니가 왜 이 동네를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에 약하다. 저벅저벅, 뚜벅뚜벅. 자기 삶을 외면하지 않고 등에 짊어진 채 길을 만들어 가는 여자들의 이야기. 거기엔 밝고 영광스러운 환희도 있지만 어둡고 두려운 구석도 있다. 그 무서움을 딛고 불안함을 지나 묵묵하게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 내 마음이 시키는 곳, 내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가는 사람. 언니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잘게 썬 토마토 한 입, 와인 한 입. 민소매 입은 팔 위로 찬바람이 휭 불도록 이어지던 이야기가 귀했던 이유다. 자전거 타고 멀어지는 출근길의 언니를 보면서 자연스레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그게 가깝지는 않겠으나 그리 멀지도 않다는 것, 그래서 슬프거나 아쉬울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사이 나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지,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지, 결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