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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량 Jan 28. 2022

한여름 밤의 칵테일

럼이 우리를 여름으로 데려다줄거야


어느 8월 말의 일요일 저녁이었다. 또 한 번의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느지막히 가로수길에서 만난 친구와 한강 반포지구까지 걷다 헤어진 차였다. 강 건너 장충동 집까지 어떻게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다, 일단 좀 더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여름 처돌이에게 얼마 남지 않은 여름밤 산책은 길면 길수록 좋았으니까.


그날따라 낮의 열기가 길에 고스란히 스민 듯했다. 잠수교를 건너 녹사평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지나자 갑작스러운 피로와 갈증이 덮쳐왔다. 쉬어가야 해, 시원한 걸 마셔야 해-라고 무의식이 외쳐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리단길의 어느 바에 앉아 있었다. 활짝 열린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커다란 창과 대조되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바 테이블에 비치된 의자 뒤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홀 안쪽으로 촛불 같은 조명이 체 게바라와 밥 말리 포스터를 비추고 있었다. 그래 딱 한잔만 하고 가자 마음먹고 구깃한 종이에 손글씨로 쓰인 메뉴를 훑어봤다.


30개가 넘는 칵테일 중 무얼 마실까 고민하다 평소에는 절대 주문할 리 없는 쿠바리브레가 눈에 들어왔다. 내게 콜라는 신성한 음료다. 코크 제로든 잭콕이든 보드카콕이든 코크 오리지널이 아닌 것은 이미 치명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라임주스, 콜라, 럼을 대애충 섞어 만든 쿠바리브레라니.


하지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가끔 생각지도 않은 메뉴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끌릴 땐 본능이 이성의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란 걸 수많은 경험으로 일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홀린 듯 쿠바리브레를 주문했다. 위스키 글라스에  담겨 나온 액체를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알았다. 콜라는 (믿을 수 없게도)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걸. 내 몸은 럼, 럼을 찾고 있었다는 걸.


그러고 보면 당연했다. 럼은 서인도 제도의 끈적끈적한 여름밤을 나기 위해 탄생한 술이었다. 17세기 노예들과 항해하는 낮은 인생들에게 럼은 고된 뱃일의 윤활유였겠지. 요즘에야 니트로 마시는 프리미엄 럼도 꽤 보편적이지만 럼은 섞어마시는 게 더 일반적인, 그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더 일상적인 술이다. 그런데도 굳이 럼을 찾게 되는 이유는 위스키에도 데낄라에도 없는 이국적 바다의 낭만이 있기 때문이겠다.


럼은 무슨 맛이 나나요? 이게 참 애매하다. 럼은 카리브해 바닷가 맛이 난다. 마셔보지 않으면 몰라요 이게 무슨 댕소린가 싶다면 마셔보는 수밖에 없다.


도시의 여름밤엔 모히또가 제격이다. 민트와 라임, 클럽 소다와 설탕이 하이볼 글라스에 가득 채운 얼음과 어우러져 청량하고 상큼하고 기분 좋게 달다. 어른의 사이다는 이런 맛이지.


휴양지로 떠나는 단꿈을 꾸는 날엔 피나콜라다만   없다. 미리 만들어진 믹스를 쓰는 곳도 많지만 코코넛 크림과 파인애플 주스를 따로 사용하는 편이 훨씬 맛있다. 부드러운 크림, 산뜻한 파인애플과 럼의 향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한겨울, 여름을 꿈꾸는 밤에는 다크  스토미를 마신다. 다크 럼의 묵직한 캐러멜향과 시나몬 향이 진저비어와 라임을 만나 깊은 적도의 밤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럼 가을에는요? 글쎄, 여름에 신나게 마셨으니 가을은 와인과 위스키와 막걸리에게 양보하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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