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불쑥, 다음 달쯤 여행을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불쑥, 다음 달쯤 여행을 간다고 했다. 마치 지난달 다녀온 포르투갈의 작은 섬은 오래전 일이었던 것처럼. 이제야 시차 적응을 겨우 마쳤다고, 나이를 먹을수록 적응기간이 길어진다고 대화를 나눈 게 불과 2주 전이었는데 언제 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십 년을 넘게 알아온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같은 전공 출신 중 유일하게 다른 커리어를 선택하더니 어느 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가, 어느 날 불쑥 이제 다시 동네에서 보는 사이가 될 거라며 돌아온 지 2년 남짓이 된 터였다.
어디로? 시칠리아로, 열흘 정도. 영화 대부에서 본 헐벗은 벌판과 여행 잡지에서 얼핏 보았던 오래된 유럽 소도시의 활기찬 광장이 머릿속에서 교차 편집됐다. 알 것 같지만 생경한 곳. 어느 날은 삶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건조했다가 어느 날은 세상의 모든 생명과 닿아있다고 착각할 만큼 농밀한 공기에 녹아 대기 중으로 흩어져버릴 곳인 것만 같은.
왜 그렇게 자주 여행을 가?
분명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였겠지만 오래 알아온 사이인 만큼 세세한 이유는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덩어리로 뭉뚱그려져 있었다. 새삼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지겨워서.
일상이?
나 자신이.
마주친 두 눈이 살풋 웃어왔다. 와인 맛있다. 토스카나 산 카버네 소비뇽인데 전에 마셨던 프랑스 산 피노누아가 생각나네. 그녀의 긴 손가락에 걸쳐진 매끈한 와인잔이 붉은 포도주와 창 너머 노란 가로등 빛을 받아 주홍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겨울 때 없나. 머릿속에서 맴도는 너무 나 같은, 나일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 그리워하는 풍경도, 사람도 늘 같고 갈망하는 무언가도 늘 거기서 거기. 새로운 것도 새로운 게 아닌 게 지겨워서 그저 꺼져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거지 뭐.
아 인간관계는 예외야,라고 웃으며 잔에 남은 와인이 비워졌다. 잘 숙성되어 적당히 진부해진 게 좋아.
너답네 하고 웃었다. 그러게 난 또 나 같네라며 그녀가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