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신화의 허상: ‘시장’만이 아니라 ‘시민’과 ‘국가’가 필요하다
지난 글에서 '모두가 함께 투자하는 사회'를 상상하며 사회책임투자(SRI)와 커뮤니티 펀드와 같은 새로운 대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노력을 통해 돈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가능함을 확인했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금융 시스템 전체의 판을 바꾸지 않는다면, 개인의 작은 실천은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파도 자체를 바꾸는 일, 즉 ‘금융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15년간 재정 상담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좌초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성실하게 일했던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시스템의 탐욕으로 인해 평생 모은 자산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재테크를 잘했으면 됐을 텐데'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근본적인 신뢰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재테크 공화국'은 우리에게 금융 시장을 유일한 부의 창출자로 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시장은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효율적인 존재이며, 개인은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신화가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본질은 이윤 극대화이며, 시장은 결코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시장은 이윤을 사유화하고, 그 위험과 손실은 사회 전체에 떠넘기는 속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시장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금융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과 '국가'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금융은 소수의 투기꾼과 금융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삶에 직결된 공공재이기 때문입니다.
1. 국가의 역할: 안전망 구축과 공정한 규제
국가는 금융 시장의 탐욕을 견제하고, 국민의 삶을 보호하는 강력한 안전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공적 시스템 강화: 지난 글에서 논의했듯이,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연금 제도의 신뢰를 회복하고,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의료, 주거, 돌봄 등 사회보장 시스템을 확충해야 합니다.
시장 규제 강화: 투기를 조장하는 금융 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금융회사가 과도한 위험을 추구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특히 개인 투자자를 보호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2. 시민의 역할: 주체적인 감시와 참여
시민은 더 이상 금융 시스템의 수동적인 이용자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금융 리터러시 강화: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금융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이를 통해 금융회사의 상업적 메시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에 맞는 금융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금융 행동주의: 사회적으로 비윤리적인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 불매 운동이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사회적 책임투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는 돈을 통해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3. 금융의 역할: 공적 가치 추구
금융 또한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공적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 서민들을 위한 포용적 금융 상품 개발 등 금융 시스템 자체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도구로 기능해야 합니다.
'재테크 공화국'은 돈을 불리는 기술만을 가르쳤지만, 결국 우리를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돈의 주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융의 주인이 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을 나의 삶과 가치에 맞게 통제하고 사용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금융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은 이처럼 개인의 삶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이는 모두가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여, '포용 금융'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금융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