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부채·위험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
지난 글에서 금융을 소수의 투기꾼이나 거대 자본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시민의 삶을 보호하는 공공재로 인식하고 회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금융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포용 금융’입니다.
저는 지난 15년간 재정 상담을 하며, 금융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인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신용 점수가 낮거나,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도권 금융에서 배제된 이들이었습니다. 은행 대출은커녕, 최소한의 금융 서비스조차 이용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결국 높은 이자의 사금융으로 내몰렸습니다. 이자 원금 상환의 굴레에 갇혀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금융이 소수의 부를 증식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다수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현대 금융 시스템은 신용 점수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이를 기준으로 삶의 기회를 차등적으로 제공합니다. 신용 점수는 단순히 돈을 갚을 능력을 넘어, 한 사람의 성실성과 미래 가능성까지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담 경험을 통해 신용 점수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반영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빚의 굴레: 한 청년은 가족의 병원비 때문에 빚을 지게 되었고, 신용 점수가 낮아지자 더 높은 이자의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자 상환을 위해 두세 개의 일을 병행했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빚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갑작스러운 불운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낳은 결과였습니다.
리스크의 전가: 금융 시스템은 대출이나 투자의 위험(Risk)을 고스란히 개인에게 전가합니다. 은행은 신용이 낮은 사람에게 높은 이자를 물려 이윤을 극대화하고, 만약 대출 상환이 어려워지면 그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불공정한 시스템은 금융이 모두를 위한 공공재가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사유재에 머물게 합니다. 우리는 이제 신용, 부채, 위험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모색해야 합니다.
포용 금융(Inclusive Finance)은 소외된 계층까지 아우르는 금융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한영섭(2023)이 주장했듯이, 금융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것이 사회 전체의 불안정성을 낮추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 금융의 기회 균등:
은행은 이윤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서 마이크로크레디트와 같은 소액 대출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합니다. 신용 점수가 낮더라도 상환 의지와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빚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2. 공동체의 역할 강화:
국가와 은행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 또한 포용 금융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이나 커뮤니티 펀드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서로에게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거나, 소규모 사업을 지원함으로써 금융의 공공성을 실현하는 좋은 대안입니다.
3. 새로운 신용 평가 시스템:
개인의 금융 거래 기록뿐만 아니라, 성실한 납세 기록, 공공 서비스 이용 기록 등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하여 신용을 평가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신용 점수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금융의 기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포용 금융은 금융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믿고,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사회가 될 때, 돈 때문에 삶이 무너지는 비극은 줄어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금융이 돈을 버는 기술을 넘어, 서로의 삶을 지키는 윤리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여, ‘재테크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라는 최종 비전을 제시하고, 우리가 그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