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없이는 시작할 수 없는 삶의 서사
저는 지난 15년간 재정 상담을 해오며 수많은 청년들의 빚투(빚내서 투자)와 영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감에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는 이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영끌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고 단정하며 찾아오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희망보다는 절박함이, 욕망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서려 있었습니다. 영끌은 이제 단순히 돈을 불리기 위한 공격적인 투자 전략을 넘어, 불안한 미래를 살아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 되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한 30대 중반의 청년은 안정적인 대기업에 다니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연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낮으로 재테크 관련 책을 읽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 강의를 들으며 초조해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안에 결혼해서 집을 구해야 하는데,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전세 보증금 올리는 속도를 못 따라가요. 그냥 이대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영끌이라도 해서 뭐라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는 그 청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 ‘내 집 마련’은 단순히 주거의 안정성을 넘어, 결혼과 출산, 그리고 삶의 전반적인 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생애주기의 시작점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집값이 폭등하면서, 이 시작점 자체가 사라지거나, 엄청난 부채를 감당해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2023)에 따르면, 2030 세대의 가계 부채 증가율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이 부채의 대부분은 주택 관련 대출입니다. 이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 영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이 시작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많은 청년들이 월급의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쏟아부으며 '생애주기'의 중요한 결정들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영끌은 단순한 경제적 부담을 넘어, 청년들의 삶 자체를 짓누르는 족쇄가 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채는 그들의 삶에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직업 선택의 제한 : 빚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높은 월급을 주는 직장에 매달립니다. 퇴사나 이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관계의 붕괴 : 부채 상환을 위해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취미 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는 소원해지고 고립감을 느끼게 됩니다.
미래 계획의 마비 : 결혼, 출산 등 중요한 인생의 결정들을 무기한으로 연기하게 됩니다. 영끌로 시작한 삶이 오히려 미래를 가로막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청년들의 불안이 가계 부채 증가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낮은 출산율과 사회적 활력 저하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청년들의 영끌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위험 신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영끌을 개인의 무모함으로 비난하기 전에,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사회의 구조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왜 청년들은 노동의 가치를 믿지 못하고, 빚을 내서라도 자산 시장에 뛰어들어야만 했는가? 왜 내 집 마련이 더 이상 안정적인 삶의 기반이 아니라, 투기와 부채의 상징이 되었는가?
저는 지난 15년간 재정 상담을 해오며 청년들의 부채 문제를 단순한 ‘금융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빚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 부모 세대와 다른 출발선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영끌은 바로 이 모든 감정이 폭발한 결과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 사회가 투기적 자산에 눈을 돌리게 된 또 다른 원인, 즉 ‘가상자산, 희망인가 환상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코인 열풍이 어떻게 투기적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는지, 자산이 아닌 기대감에 투자하는 위험에 대해 더 깊이 있게 다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한국은행. (2023). 『금융안정보고서』.
한영섭, 『청년 부채 현황 진단과 과제』, 세상을 바꾸는 금융연구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