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가 전하는 말과 글이 가진 있는 무게에 대하여
광고 기획자라고 말하거나, 광고 회사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 직접 내는 사람’ '카피를 쓰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회사의 규모나, 주요 비즈니스에 따라 아이디어를 직접 내는 AE들도 있지만 종합광고대행사 AE는 거의 마케터/PM과 유사한 직무를 한다.
일정을 관리하고, 비용을 관리하고, 캠페인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회사 외부에 있는 광고주와 논의하여 회사 내 제작팀이 아이디어를 잘 낼 수 있도록 디렉팅 혹은 서포팅하는 것이 AE의 역할이다.
디렉팅과 서포팅이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지만, 광고주의 의견을 강하게 반영시켜야 할 경우 디렉팅에 가깝고, 광고주 의견은 참고정도만 하고 자유롭게 크리에이티브를 내야 할 경우 서포팅에 가깝기에 직급에 상관없이 AE는 두 가지 역할을 다 수행하게 된다.
AE의 본업은 커뮤니케이션이다. AE는 아이디어를 잘 내지 않는다. AE는 포토샵 켜고 직접 디자인하지 않는다. AE는 프리미어 켜고 영상 편집을 하지 않는다. 어떤 회사 AE는 미디어 플래닝도 안 한다. 그냥 커뮤니케이션만 한다.
가만 보면 AE는 입만 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입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입이 죽으면.. 말빨이나 글빨이 떨어지면.. 굶어 죽게 되는 사람들이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입만 살아, 말만 해도 돈을 줄까?
생각해 보면 AE의 말에는 꽤 여러 가지 의미로 무게가 실려있다. 만약 그 말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한마디가 앞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지를 상상하며 직접 무게를 실어봐도 좋다.
“광고주가 A가 아닌 B방향으로 수정해 달라고 합니다.” AE의 이 한마디가 가끔 디자이너 2~3명이 며칠간 작업했던 파일을 놔두고 새 파일을 만들게 하고, 프로덕션은 27일에서 28일로 날짜가 바뀌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촬영지, 모델, 의상, 조명 등 오만 곳에 전화를 돌리고 새로운 촬영지를 알아보기도 한다.
그런데 차라리 수정이 낫다..
"A로 만들면 됩니다."라는 AE의 말만 믿고 A로 준비했는데 광고주가 "저는 B로 말씀드렸는데 커뮤니케이션 미스가 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그것만 한 비극이 없다. 말 하나에 TFT에 포함된 사람들의 모든 시간이 무(無)로 돌아간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부담스럽다. “말 한마디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거 아냐?”, “그냥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게 AE가 말을 해석하지 않고 전달하기만 하면 프로젝트 전체가 흔들리는 걸 자주 본다. 어느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크리에이티브를 제작해야 할지, 그 누구도 모르는 상황 말이다.
무거운 말만 하자는 것은 아니다. AE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자세’를 가질 때, 그 프로젝트는 좀 더 단단해진다. 그래서 AE는 자신의 말이 남의 시간과 노동 위에 세워진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좋은 AE는 말로써 일을 전진시키고, 그 말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AE는 누군가의 번역가가 된다. 클라이언트의 말은 종종 명확하지 않고, 제작팀의 아이디어는 종종 날것 그대로다. 그 사이에서 AE는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갈무리해야 한다. (오늘은 내가 황석희 번역가~~!)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아니고, 제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클라이언트가 아닌데도 그들처럼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냥 전달자일 뿐”이라는 방어막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하지만 바로 그 ‘전달’이라는 역할에 AE의 진짜 무게가 숨어 있다.
'전달'이라는 행위는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가진다. 단순히 누가 한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투로, 어떤 맥락으로, 어떤 타이밍에 전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AE의 전달 방식 하나에 프로젝트가 매끄럽게 흘러가기도 하고,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말은 도구가 아니라 방향이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많이 봤다. 클라이언트가 헷갈리는 말을 남겼을 때, 팀에 정확하게 번역해서 전달하는 AE. 제작팀이 휘몰아치며 아이디어를 쏟을 때, 조용히 정리해서 클라이언트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AE. 이들은 ‘전달자’가 아니라 ‘연결자’였다. 정보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메운 것이다.
선배들이랑 농담처럼 말한 적 있다. "와.. 메일 몇 개 썼다고 하루가 다 가냐. 뭐 한 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힘드네, 이제 관상 배우자. 이제 모델 과거 학폭까지 맞춰야겠다." 다들 웃었지만, 이 말에는 AE라는 직무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다.
AE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고려해야 하는 사람이다. 콘텐츠의 감정선, 브랜드의 톤, 클라이언트의 예산, 제작팀의 현실.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밸런스를 잡는다. 그래서 리더가 아니어도 리더십이 필요하다. 타이틀이 팀장이 아니어도, 팀을 이끄는 말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리더십이 직책이 아니라 태도라는 말이 실감 나는 직군이다.
AE가 던지는 말 한마디가, 회의 시간에 보여준 RFP/킥오프 브리프 속 한 줄이,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작업과 감정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말할 때마다 조심스럽다. 말 한마디를 믿고 모든 동료들이 움직여준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게 AE로 일하는 이유이자,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니까.
AE는 선장이다. 사원도 선장, 대리도 선장, 과장도 선장.
그리고 이 배는, 우리가 말한 방향으로 항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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