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1일, 사회생활 10년 차.
2011년 8월 31일, 첫 출근.
솔직히 그 날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니 조금 설레었던 것 같기도..
그렇게 시작해서 여기까지 와 버렸다.
2020년 8월 24일, 오늘.
일주일 후면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된다.
문득, 10년의 사회생활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고 싶어 졌다.
모두들 삶을 정리한다고 말하며, 삶을 끝낸다. 그때 정리한 생각들을 '유서'라는 종이에 적는다. '유서'에는 대부분 회고, 반성, 아쉬움, 철학 등을 적는다. 가진 것이 많다면 상속과 유산도. 군대에 있을 때였나? 어떤 모임을 가서였나? '유서'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당장 내일모레 죽는다면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남길 것인가. 결론은 뻔하다. '유서에 쓴 것처럼 지금 사세요.' 다이어트하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 같다.
미리 쓰는 유서 같은 것보다는..
진짜 정리가 하고 싶어 졌다.
나라는 사람을.
지금까지의 삶을 잘 정리해서.
조금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왜 살고 있고, 뭘 좋아하며, 뭘 싫어하고, 어떤 성격이며, 무엇을 잘하며, 무엇을 못하고 같은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한 것보다는 내가 어떤 심리에서 그런 행동을 해 왔는지를 보고, 결국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통해 내 삶의 방향을 정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거짓말을 잘한다.
나는 거짓말을 굉장히 잘한다. 하지만 굉장히 나쁘다고 생각하며, 이를 굉장히 고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런가. 말하고, 글을 쓸 때 <사실>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쓰는 것 같다. 자매품으로 <팩트만 말하면>도 꽤 많이 썼던 것 같다. 남을 속이기 위해 <사실>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는다. 진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실>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난 내 거짓말이 척추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마치 '넵' 같이. 요즘 같은 '넵' 세상에 나는 상위 호환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 거짓말 실력은 어디서 온 걸까. 하찮은 과시욕일까. 직업병일까. 난 사실만 말하며 살고 싶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게 된 걸까. 생각해 본다.
나는 미움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짓말이 늘었나 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일까. 나는 어지간하면 괜찮다고 말한다. 어떤 일에 대해 중재하기 좋아한다. 적절한 타협을 좋아한다. 순응하는 법을 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모습이 참 보고 있기 힘들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상황도 견디기 힘들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잘 보이고 싶고, 멋진 사람이고 싶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하는 마음에 과시하고자,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사실, 하기 힘든 일도, 하기 싫은 일도 다 괜찮다고 하는. 이런 거짓말을 해왔던 것 같다. 아마, 거짓말의 시작은 '넵'이였겠지. 광고주 미팅, 회의, 가정 등 상황에 맞춰 이래저래 임기응변 성 거짓말까지 발전한 것 같다. 내용은 달라도 본질은 공감되지 않으나, 공감하는 척을 해야 하니까.. 내 기분에 관련된 것은 이렇게 참고, 타협하며 살아왔으면서, 일할 때는 달랐다. 이상하게도 일 할 때는 왜 그렇게 휘어지지 않는 작대기 같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공과 사 구분이 확실했다.
사적인 관계는 내 기준에 '좋다와 싫다'로 나뉜다. 공적인 관계는 대부분 '맞다와 아니다'로 나뉜다. 공과 사를 구분하니, 나라는 사람은 미움받지 않기 위해, 싫다고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적인 것은 그냥 수학 문제와도 같다는 생각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일할 때 많이 싸웠다. 원래 광고회사에서는 아이디어 회의할 때 막 싸운다고 배웠다. 그러고 나서 그 공적인 관계가 사적인 관계에 반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이 끝나고 나면 가서 꼭 사과를 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땐 제가 죄송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척추에서 나온 거짓말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여하튼 그렇게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듣게 되고 그게 마치 보험이라도 된 양, 다음번에도 똑같이 싸운다. 우린 광고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저렇게 치고받고 싸우며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 들어 공과 사 구분을 못하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나는 요즘 기준이라는 것을 잘 모르겠다.
10년 간 세상 속 기준에 맞추고 살아왔다. 재수 없는 대학 입시, 빠른 군입대, 칼 복학, 졸업 전 취업, 월급 절반 저축, 열정적인 업무, 빠른 승진, 빠른 결혼, 좋은 팀장, 좋은 친구, 좋은 남편. 마치 게임 퀘스트를 깨 나가 듯이, 세상의 기준에서 달성해야 하는 것들을 빠르게 달성하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니 난 10년 간 세상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나 보다. 거짓말하고, 타협하고, 싸웠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다. 친구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 광고 기획과 제작은 원래 싸우면서 일하는 거다. 원래 광고 회사는 밤새고 일하는 거다. 3년 이상 한 회사에 있으면 도태된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열정에는 기름을 부어야 한다. 서른 전에 결혼해야지. 남자가 대는 이어야지. 어디서 시작된 말들일까. 일리는 있지만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10년 전 어리었던 나에게는 지금 와서는 별것 아닌 몇 마디 말이 진리가 되었었나 보다. 세상 남이 하는 말 중에 진리는 없다. 대학을 꼭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회사에서도 소울 메이트를 만날 수 있었다, 6년간 한 회사에서 있어도 성장하더라, 퇴사가 성장은 아니며, 퇴사가 이별도 아니더라. 조언은 성장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강요는 성장하는 사람에게 꼭 피해야 할 것이다. 기준에 대한 의문을 품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생각해 본다.
나는 기준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아니, 나를 찾고 싶은가 보다. 그게 나만의 철학일까. 나라는 사람의 브랜딩일까. 아니면 나만의 페르소나일까. 팀장 한상진, 남편 한상진, 친구 한상진, 한국 사람 한상진, 회사원 한상진이 아닌, 본 투 비 한상진을 찾고 싶은가 보다.
꽃길을 걷기 위해 달려왔는데.
꽃길을 달리니까 그렇게 좋진 않더라.
꽃가루도 날리고, 주변의 벌도 무섭고, 향기에 취해 자꾸 눌러앉고 싶더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매일 보는 꽃들이 지루하더라.
꽃길을 걷다 보면, 흙길도 걷고 싶고, 바닷길도 걷고 싶고 그렇더라.
요즘,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오르기는 힘들지만 새로운 공기도 마시고, 넓은 경치도 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지난 10년간의 삶을 정리해본다, 향후 10년간의 삶을 생각해본다.
가끔 목표와 꿈을 말할 때 진심 섞인 농담으로
백종원, 유재석, 유현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게 뭐가 되었는 나만의 철학을 가진 사람을 꿈꾼다.
위에 주저리주저리 썼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그냥 MBTI를 믿었으면 쉬웠을 것 같다..
저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로 봐서, 철학적이기도 하고 이상적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사이에서 중재하고 타협한다. 남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이렇게 보니까 어디서 본 것 같다 싶었는데, 난 INFP. 열정적인 중재자였다.
(MBTI가 원래 이렇게 잘 맞는 거였나..? 재미로 하는 거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