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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ul 31. 2021

남편 책 읽히기 프로젝트

결혼 후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회사에서 동기로 만난 남편의 이미지는 꽤 차분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라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날 때 보면 이마에 주름을 잡고 뭔가를 읽고 있는 모습이 진지해 보였고, 대화를 나눌 때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좋아져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예상을 벗어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 책 많다."

"어, 그냥 소설책 좋아해서. 근데 오빠는 책 별로 없네. 다 두고 왔어?"

"아니, 난 책 원래 안 읽어. 나 지금까지 태어나서 책 두권 읽었어."

웃기려고 한 말인가? 아니다. 표정이 진지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학교 다닐 때 권장 도서 그런 것도 안 읽었어?"

"교과서랑 뭐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건 읽었지. 근데 그냥 읽은 건...... 억지로 읽은 건 있는데 기억 하나도 안나. 옛날에 유명해서 읽은 '7막 7장' 그거랑 또 하나는 뭐더라? 아무튼 생각 안 나는데 그거 두 개만 끝까지 읽었어."


그것을 '사기결혼'이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극단적인 걸까?

가끔 자리에 앉아서 논문을 보던 건 일하느라 봤던 것인가 보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책에 대한 얘기는 연애하는 내내 꺼낸 적도 없는데.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건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만든 말인가 보다.

아무튼 결혼을 무를 만큼 큰 일은 아니고, 그로 인해 내가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이 팍 줄어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실망스럽기는 했다.  


그 후에는 신혼 때 놀러 다니랴 TV 보랴 나도 거의 책을 읽지 않았고, 임신 기간 중에도 퇴근 후에 잠들기 바빠서 특별히 독서 시간을 오래 갖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니 더욱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본능인지 신혼 때는 게을리하던 독서가 막상 아기를 낳고 시간이 없으니 더욱 하고 싶어 졌다.


"여보야, 나 책 읽고 싶은데 도저히 애 때문에 못 읽겠어. 나 이 책 좀 읽어줘."

아기띠에 애를 매달고 남편에게 넘겨준 책은 '이부진 스타일'이었다.

그때 왜 그 책을 샀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불안해서인지 자기 계발 서적을 막 사들였던 것 같다.

평생 두 권의 책을 읽었다는 남편의 말이 모처럼 생각나서 뭔가를 좀 읽히고 싶기도 했고, 나도 사놓은 책들을 어떻게든 보고 싶은 마음에 교대로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충동적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책은 절대 읽지 않지만 뉴스는 열심히 보는 남편이 그나마 그 책은 흥미 있게 읽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남편은 강렬한 내 눈빛을 피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책을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 어 이거 좀 재밌네."

삼성가와 이부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하고 글자 수도 많지 않아 술술 읽히는 책이어서 남편도 지루해하지 않고 꽤 재미있게 읽어주었다. 조금 읽다가 아기와 책을 교환하여 남편이 아기를 안고 내가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날이 교대로 책 읽어주기의 첫날이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시간이 날 때면 우리는 아기와 책을 번갈아 들고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는데 아기도 부모가 책 읽는 소리가 싫지 않았는지 보채지 않고 잘 들어서 그 행위를 꽤 오랫동안 지속했던 것 같다.


얼마 후 남편에게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라는 책을 슬며시 건네 주었다. 내가 먼저 읽어보니 재미도 있고 책 읽기 동기부여도 될 것 같아 시험 삼아 남편에게 전달해 보았다. 아기가 조금 커서 책 읽어주기 작업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그렇게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읽기 쉬운 그 책은 남편의 독서 욕구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고, 냄비처럼 열정이 끓어오른 남편은 갑자기 책 백권 읽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겠다며 독서 노트도 만들고 책도 엄청나게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 남편이 대규모로 구입해 오는 책들 중 많은 것들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핀잔을 주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을 했었다. 사실 나도 독서량이 많거나 다방면의 책을 많이 본 것은 아니었지만 30대 중반에 생전 처음으로 책을 사기 시작하는 사람이 고르는 책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들이 참 많다는 사실도 이때 알게 되었다.

금방 그만둘 줄 알았던 남편의 독서는 놀랍도록 오래 지속되었고, 남편은 그 해에 1년이 채 되지 않아 100권의 책을 다 읽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고 흥미 있는 책들을 빠른 속도로 읽어내는 존경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야기 위주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돈과 부에 대한 강한 집념이 있는 남편은 부동산 경제에 대한 책들만 읽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가 책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 남편의 모습이 대견했다.

(경제 서적을 열심히 읽어서 성과가 우리의 자산에도 반영되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지식이 계좌로 들어오지는 않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두고 보도록 하겠다.)

그때 남편에게 놀란 것과 더불어, 어렸을 때 책을 읽지 않더라도 성인이 되어서 얼마든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하며 참 신기하기도 했다.


거의 몇 년간은 부동산과 경제 서적만 읽던 남편이 최근 들어 에세이와 처세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고 있다. 그것도 꽤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쪽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으면 책 읽기 근육이 성장하는 것인지 점점 빨리 읽게 되고,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능력도 길러지는 것 같다.

이제는 소설책과 에세이만 보는 나도 책 편식을 그만두고 경제 서적이나 철학 서적 같은 것들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반성까지 하게 되었다.


가끔 같은 만화책을 보고 또 보는 아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글씨 책 좀 읽으라고 하면 자기 구미에 당기는 것만 반복해서 읽는 것이 못마땅할 때도 있는데 이런 것들도 결국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개선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빠도 전에 책 안 읽었는데 엄마가 추천해 준 책 읽고 재밌어졌어. 너도 지금 읽기 싫더라도 괜찮아. 나중에 재밌어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아들의 독서에 대해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놓치마 정신줄'만 후벼 파고 있는 아들을 보며 해리포터도 좀 읽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가시지 않는 걸 보면, 남편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과 자식의 발전을 기대하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절박함의 깊이가 다르긴 한가보다.

독서는 즐길 때 가치도 효과도 있으니 아이도 어른도 책 읽기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계기를 만들어주고, 내가 즐겁게 읽는 모습이나 보여주는 것이 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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