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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un 01. 2021

그때, 이말할걸...약과의 기억

십 년 묵은 체증 해소 프로젝트

변변한 학원이 없던 서울 변두리 우리 동네에는 불법 영수학원이 있었다. 초등학생 대상의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원장님이 대학생 선생님을 고용하여, 어느 빌라의 지하실 월세방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게 하는 불법 과외 같은 곳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니던 학원 원장님이 안내하시는 대로 나와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지하 교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는 그게 불법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 같다.

일주일에 영어 세 번, 수학 세 번 수업을 들으러 학원에 갔고, 선생님은 당시 서울교대를 다니던 대학생들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은밀한 느낌이 드는 지하 월세방에서 몇 명 중학생과 과외선생님의 수업시간은 늘 재미있었다. 돌이켜보면 갓 스물이 넘은 대학생 선생님들에게도 문 밖에 앉아 감시하는 부모님이 없는 독특한 과외 아르바이트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악덕 사장에 가까웠던 원장님이 가끔 암행어사 출두하듯이 지하 교실에 와서 선생님들에게 똑바로 가르치고 아이들을 다잡으라고 행패를 부리고 가는, 장학사의 방문 같은 행사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정한 선생님들은 언니 오빠 같아서 가끔 간식을 사주기도 했다.

"아이스크림 사주까?"라고 물어보던 선생님이 고작 대학교 2,3 학년이었을 뿐인데도 중학교 1학년인 우리에게는 정말 큰 어른인 것 같았다.


그날은 토요일에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선생님이 수업시간보다 조금 일찍 오면 간식을 사주겠다고 했던 날이었다. 나는 집에 일이 있어 수업시간에 맞춰가야 했고 달콤한 주말 오후 간식타임을 놓치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간식이 욕심났다기 보다도 친구들과 선생님과 슈퍼 앞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끝나 학원 앞에 도착해보니 생각대로 아이들과 선생님이 슈퍼 근처 길가에 앉아서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갔더니 한 친구가 장난스럽게 자랑을 했다.

"우리 약과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엄청 먹었다~"

그 정도 자랑을 진심으로 할 나이는 지났고 약과도 아이스크림도 부럽지는 않아서 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는데, 선생님이 늦게 온 학생에게도 간식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너도 뭔가를 사 줄 테니 슈퍼에 가자고 하셨다. 뒤늦게 와서 얻어먹는 것이 왠지 미안하여 거절했으나 선생님이 두 번 권유하시는 걸 거절하기는 그 또한 민망하여 그러겠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뒤이어 친구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먹고 또 먹어?"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니 더 몸 둘 바를 몰라 변명을 했다.

"나 늦게 와서 못 먹었어."

"누가 늦게 오래?"

그때 걔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내가 조용히 친구들 무리에 합류하긴 했지만 늦게 와서 간식을 얻어먹지 못한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더 아리송했던 것은 도대체 대화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많이 먹어놓고 또 먹냐는 물음에 나는 늦게 와서 먹지 못했다고 답했는데 마치 내가 늦게 와 놓고도 간식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기라도 한 듯한 그 물음은 뭐란 말인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얼떨결에 선생님을 따라 들어가 고른 과자는 '약과'였다.


참 바보 같기도 한 것이 나는 약과를 싫어한다. 진득하고 들큰한 맛이 싫어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도 한쪽이나 떼어먹고 마는 과자인데 굳이 약과를 고른 이유가 뭐였을까. 뭔가 그 친구들이 먹은 그 과자를 나도 먹어야 한다는 부담 같인 것이 있었던 걸까.


아무튼 그날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 다시 수업을 하러 들어갔는지 또 수다를 떨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별 뒷얘기 없이 즐거웠고, 괜한 가시 돋친 말로 나를 당황시켰던 친구와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아마도 가끔 만나는 그 친구에게 가서 '너 30년 전에 나한테 왜 그랬어?' 라고 묻는다면 기억하지도 못할 뿐더러 나한테 미쳤다고 할게 뻔한다.




가끔 약과를 볼 때마다 늘 정확히 그 일이 생각난다. 이상하게 약과는 그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었는데 약과만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정말 쓸데없이 '그때 이렇게 말할걸' 하고 늘 되뇐다.


"야, 니가 물어봤잖아. 그렇게 먹고 또 먹냐고. 그러니까 난 못 먹었다고 대답한 거야. 늦게 왔는데도 사달라고 조른 게 아니라고!"

그리고 당당하게 선생님을 따라 슈퍼로 들어가서 들척지근한 약과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핫브레이크를 집었어야 했다.


어제저녁 식당에 앉아서 친구들과 카톡을 하는데 친구 한 명이 약과를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 이 이야기가 또 한 번 떠올랐다. 가끔 그날이 생각날 때마다 묘하게 짜증이 올라왔는데 이렇게 적다 보니, 자기가 한 말, 남이 한말에 예민했던 열네 살 아이들의 오해와 은근한 견제가 아니었을까 이해가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여럿이 시끄럽게 떠드는 상황에서 늦게 온 나뿐 아니라 다 같이 또 무엇인가를 사 먹으러 가자는 걸로 이해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가 대뜸 나는 늦게 와서 못 먹었다고 반발하니 그 친구도 겸연쩍어 '누가 늦게 오래?' 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사건은 너무 사소한데도 가끔 잠깐 고요한 울화를 치밀게 하는 성가신 기억이었는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그때 못해서 속 터지던 말을 글로 적어보니 우습게도 다시 돌아가서 한마디 쏘아주고 온 것처럼 속이 후련하다.


그리고 찬찬히 정성 들여 떠올려보니 그럭저럭 까칠까칠하고도 귀여운 날들이었다. 이제 약과 보면서 괜히 짜증스러울 일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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