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Dear 워킹맘

워킹맘의 합정역 일탈, 잠깐이라도 기분좋은 일을하세요.

'땡스 북스'에 갈수 있었던 날

by 춘춘
“네이버 지도를 따라 382미터를 걸었다. 어렵지 않게 찾은 서점은 사진처럼 예쁘고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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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서울 한복판에 나갔는데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 싫었다. 외근 나가 일을 마치고 나니 퇴근시간 무렵이었다. 바로 집으로 가야 했지만, 한 정거장만 가면 합정역이라 한번 가보기로 했다. 요즘 합정역이 좋다고들 하니까 분명히 서점도 있을 것 같았다. 검색 화면에 가장 눈에 띄는 서점이 있다.


땡스북스

'아, 여기에 가고 싶다.' 가고 싶은 곳을 바로 갈 수 있는 자유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던 자유로운 시절에도 가고 싶은 곳으로 훌쩍 이동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제 덜그럭대는 것들을 좀 더 주렁주렁 달고 있는 처지인지라 더 쉽지 않다.

오늘은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런데도 망설임은 끝이 없다.


'반대 방향? 집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건 너무 비 효율적인데? 게다가 지금 갔다가 서점에서 20분만 책을 봐도 퇴근시간에 겹치는데 집에 가는 길이 너무 복잡해지지 않을까? 차라리 서점을 포기하고 빨리 지하철을 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어제 yes24에 주문한 책이 한 뭉텅이 도착했는데 무슨 책을 또 사러가? 특별히 살 것도 없으면서…

하지만 이렇게 번화한 거리에 올 기회가 흔하지 않은데, 그것도 나 혼자서 올 수 있는 금쪽같은 기회를 이렇게 놓쳐? 잠깐 가서 딱 15분만 책 보고 집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 말고 더 예쁘고 좋은 서점을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데 목적지를 너무 급하게 정한 거 아닐까?'


가끔 예상치 못한 자유시간이 생기면 가장 실속 있고 달콤한 짓을 하고 싶어 늘 시간을 허비한다. 여기저기 검색하며 길에서 서성이다가 결국은 시간이 부서져 아무것도 못하고 말 때도 많다. 또는 너무 따지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곳에 들어가 후회를 한다거나.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고민 끝에 집으로 가는 반대 방향의 2호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갔다. 이건 대단한 결심이다.


딱 눈에 들어왔던 그 서점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시청 방향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합정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네이버 지도를 켜고, '땡스북스'를 검색하고, 길을 찾아갔다.



네이버 지도를 따라 382미터를 걸었다. 어렵지 않게 찾은 서점은 사진처럼 예쁘고 아늑했다.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책들이 많았다. 대형서점에서라면 쉽게 보이지 않을 책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가면 벽에 붙은 서가에 멀찌감치 꽂혀 있을 책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고요한 책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기뻤다.


세 권을 골랐다. 모서리가 약간 찍혀서 할인이 되는 책들 중에 평소에 보고 싶던 책이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서평을 보고 귀여운 작가라고 생각했던 사노 요코의 책, 눈여겨보았지만 아직 시도해 보지 않았던 금정연 작가의 책, 그리고 브론테 자매 평전을 샀다. '폭풍의 언덕'은 내 기준으로 가장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다. 브론테 자매 연구를 일로 삼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세 권을 사니까 '샴푸 바'도 선물로 주셨다.




오늘은 조카 생일이라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와야 하는 날이었다. 오는 길에 배스킨라빈스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케이크도 샀다. 주문 기계 앞에서 쿠폰을 쓰지 못해서 조금 버벅거리다가 당황하지 않은 척, 능숙한 척하며 단계별 버튼을 천천히 누르고 다행히 별문제 없이 결제를 마쳤다.


이런 걸 사용해야 하는 것도, 그걸 빨리 익히지 못하는 것도 좀 서글프다고 생각했는데, 다 하고 나서 내가 엄청 똘똘하고 세련된 사람인 듯한 성취감이 드는 것도 웃겼다.


참, 오는 길에 사노 요코의 만화책 '요코 씨의 말'을 다 읽어버렸는데 그래서 배스킨라빈스의 주문 기계가 더 서글펐던 것도 같다. (2021년 10월 30일 ‘워킹맘의 합정역 일탈’)





뉴스앱 <헤드라잇>에 관련된 글을 실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NIYNtkQbyZdSWURWwGiCZA==?uid=fjEdyhyxRsSw9audnSBY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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