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TV 소리가 시끌시끌했습니다. 아침마당에서 가족들이 팀을 이뤄 노래자랑을 하고, 아침부터 줄줄이 이어 명화를 보여주는 채널도 있었고요. 뒹굴거리며 TV를 보다가 엄마가 시장에 가자고 하면 따라나가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 종일 추석 특선 명작 영화를 보며 전을 부쳤어요. 엄마가 이것저것 시키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종일 동생과 TV를 보고, 차례 준비를 하고, 저녁에 영화를 보고, 미뤄뒀던 책을 읽으면 그럭저럭 느긋하고 즐거웠습니다.
결혼 전 추석 연휴 첫날은 주로 이랬습니다.
생각해 보면 결혼했다고 해서 이 일정이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일들을 하는 공간이 바뀌었죠.
결혼 후 첫 명절은 그래서 좀 서럽지 않습니까? 갑자기 남의 자식이 된 것처럼 수십 년간 해왔던 루틴을 다른 곳에서 치르니까요. 결혼했다는 사실이 가장 실감 나는 상황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결혼 십수 년 차가 되고 보니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친구들은 어제 즈음부터 카톡들을 보냅니다.
"추석 잘 쇠고, 명절 잘 보내."
이런 종류의 인사말들을 합니다.
카톡창에 '추석'이라고 치니까 배경화면에 한가위 큰 달이 떠오릅니다.
'송편'이라고 치면 알록달록한 둥근 송편이 쟁반에 담겨 나오고요. 정겹고 귀여운 그림들이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며느리라서 그런 걸까요? 솔직히 크리스마스에 띄워주는 카톡 배경 하고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카톡 배경으로 올라온 송편을 보면서 올해는 사 먹으려나? 해 먹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들도 다들 결혼한 지 한참 되고 보니 이제 서로의 명절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시가가 서울이라서 명절 전날 저녁에 출발하는 친구, 지방이라서 이틀 전부터 내려가는 친구, 동서가 자유로운 영혼이라 명절마다 여행을 가는 통에 늘 울화를 누르며 시가로 가는 친구, 올해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마음이 무거운 친구, 시어머니도 편찮으시고 친정엄마도 편찮으셔서 자기 혼자서 두 집안 살림을 다 해야 한다며 한숨을 내쉬는 친구. 다들 서로의 상황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잘 다녀오자고 온라인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저는 올해 워크숍을 간다고 생각하고 명절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저희 집은 시어머니가 음식을 많이 준비하지 않으세요. 음식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차례 준비에 물리적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대신 다른 번뇌가 좀 있기는 합니다. 저희 어머니의 요리 세계와 명절 고민에 대한 부분은 제가 브런치 북에 모두 털어놓았으니 궁금하시면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워크샵은 명확한 목적이 있고요.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데 절차가 매번 비슷해요. 준비물도 비슷하고요.
가기 전에 일단 귀찮습니다. 짐도 싸야 하고 짧지만 다른 일상이니 이런저런 주변 정리를 해야 합니다. 도착하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짜여 있어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다음 단계에 뭘 할지 다 알고 있는 프로세스를 계획대로 수행합니다. 그게 참 귀찮은데 또 손에 익어서 할만합니다.
그리고 팀장님, 본부장님들이 이것저것 번거로운 것들을 시킵니다. 어떤 해에는 생전 하지도 않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 와서 효율적일 것 같다면서 하자고 합니다. 그럼 하기 싫은데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열심히 합니다.
그래도 또 막상 가면 재밌는 부분도 있습니다. 주변 경관이 좋은 곳이면 기분 전환이 됩니다. 저녁에 술 한잔 하는 게 좋기도 하고요. 자꾸 억지로 먹으라는 진상 상사만 없다면 동료들과 얘기하며 맛있는 것 먹는 시간이 즐겁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나는 시간이 정확하죠. 밤에 한바탕 놀고 나서 숙소로 들어가 잠을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 같이 식사를 하고요. 이후에 오전 프로그램이 시작됩니다. 오전 프로그램을 하는 내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이 작업이 아무리 지겨워도 어쨌든 시간이 되면 끝나니까요.
드디어 종료시간이 되어 다들 버스 앞으로 모이세요. 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짐을 들고 주차장으로 갑니다. 주차장 앞에 모여 서너 줄로 앉고 서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관광버스에 올라타면 이제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명절도 비슷하죠?
일 년에 두 번씩 있는 명절이 잦은 것도 아닌데 엄청 빨리 돌아옵니다. 그러면 익숙한 솜씨로 짐을 쌉니다. 화장품이나 잠옷 같은 필요한 것들을 잘 정리해가지고 가면 기분이 좀 신선해져요. 그곳에서도 내가 쓰던 클렌징크림으로 클렌징을 하고, 편안한 잠옷을 입으면 놀러 가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어딘가 하루 묵었다 오는 것을 준비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리고 읽을 책들을 준비합니다. 시가에 가면 나를 잊게 되잖아요.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든, 친구들과 만날 때 어떤 사람이든 시가라는 공간에서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럴 때 내가 평소에 읽던 책을 읽으면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안 읽더라도 챙겨갑니다.
도착하면 늘 하던 프로세스대로 명절 준비를 합니다. 어머니와 시장을 보거나, 미리 사다 놓으신 음식으로 준비를 시작합니다. 이게 귀찮기는 한데 또 손에 익어서 할만합니다.
그렇게 몇 가지 음식을 하고 나면 산책을 합니다. 저희 시댁은 주변에 산책할 만한 골목들이 많아요. 어머니는 그 골목을 왜 돌아다니는지 의아해하시지만 골목과 가로등을 좋아하는 저는 꼭 그 길을 가고 싶어 해서 한차례씩 나갔다 오곤 합니다. 간장 같은 게 떨어져서 사러 가는걸 참 좋아해요.
그리고 밤이 되면 제가 가지고 간 화장품들로 기초화장을 하고 책을 읽다가 잠이 듭니다. 그러면 제가 바로 서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새벽잠이 없으신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준비를 시작하십니다. 집에서는 잘 일어나 지던 시간에 왜 시가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걸까요? 좀 죄송하지만 조금 더 뭉기적 거리다가 일어나 차례 준비를 합니다.
차례를 지내고 수북이 쌓인 설거지를 하나씩 해치우며 이 작업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점심식사 이후 2시 30분이 되면 모든 일정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곧 시누이들이 도착하고, 함께 점심을 먹습니다.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갑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며 농담이 재밌게 들립니다.
2시 30분이 넘어 3시가 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탑니다. 안녕히 계세요. 잘 지내세요. 인사를 하면서 계획된 모든 일정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