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방 침대를 창문 아래에 두었던 시절이었으니 내가 대학 다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빠가 종이 몇 장을 접어서 편지처럼 건네줬어요.
"이거 한번 읽어봐라."
"뭔데? 아빠가 쓴 거야?"
"어, 내가 쓴 건 아니고 베껴 적은 거야. 한 번씩 읽어봐."
동생과 같이 읽어보라고 준 잘라낸 노트 몇 장에 빼곡히 아빠 글씨가 적혀있었어요. 제목은 '현명한 배우자를 선택하라'였습니다.
아직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없던 나이라 대충 읽어 넘겼습니다. 잘 생각해서 결혼하고, 좋은 사람을 골라라, 뭐 이런 뻔한 얘기였어요. 기억에 남는 건 그걸 주면서 했던 아빠 말이었습니다.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해서 해야 돼. 잘 골라서. 근데 아무리 잘 골라도 결혼하고 보면 아닌 사람도 있어. 그럼 그냥 돌아와."
"이이는... 애들 데리고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하네."
"아, 생전 안 그럴 거 같은데 결혼하고 보니 폭력적인 사람도 있고, 도박을 한다거나 고쳐지지 않을 거 같은 그런 사람도 있어. 하튼 영 아니라고 생각하며 돌아와도 돼."
아빠의 조언에 바로 엄마의 타박이 이어졌지만 저는 아주 든든한 빽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종이는 그때 이런저런 추억의 잡동사니를 모아놓는 내 파일 안에 고이 모셔져 아직까지 간직되어 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서랍을 정리할 때 눈에 띄곤 하는데요. 내용을 다시 읽지는 않지만 그때 아빠의 얘기는 아직도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납니다.
나는 잘 골라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 고마운데도 신기하게 아빠의 이야기는 떠올릴 때마다 힘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같습니다.
남편과 다툴 때가 가끔 있는데요. 그래도 헤어지자거나 하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결혼 전 연애시절에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딱 한번 너무 좌절한 일이 있어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너무 서운해하며 화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과를 했지만 그때 그 표정이 슬퍼서 십 년이 지난 아직도 그때 그 말은 후회가 됩니다.
자식에게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게 부모 마음이겠죠. 안 좋은 일은 생각도 하기 싫어 아예 입에 올리지 않기도 하고요. 하지만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교차하고, 그때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생길이 갈라집니다. 그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믿고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건 평생의 힘이 됩니다.
내 결정을 지지해 줄 부모가 있다는 것, 언젠가 아빠가 세상에 안 계시더라도 내가 내린 판단은 틀리지 않을 거라는 것. 그걸 보장받는 기분 같달까요? 새삼스럽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