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13. 커피는 시간의 색깔을 바꾼다.

안락과 충만의 커피

by 춘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 지안이는 밤마다 회사에서 가져온 믹스커피를 마십니다.

저녁을 굶어야 하는 가난한 밤마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싸구려 유리잔에 믹스커피를 두 세 봉지 털어 넣어 끼닛거리를 만듭니다.


커피에 섞여있는 당분이 달래주는 것은 배고픔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로 그나마 잠시 갖는 초라한 휴식, 고소함과 따뜻함, 서글픈 안락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만약에 그 장면에서 사무실에서 집어온 쿠키를 먹는다든가 했다면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았을 거예요.


'커피 한잔'이라는 말은 다른 음식이 주지 못하는 잔잔한 설렘이 있습니다. 드라마 보기를 중단하고 싶을 만큼 마음 저린 지안이의 하루도 그 끝에 그나마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회사는 요즘 주차 전쟁 중입니다.

회사 지하 주차장에는 전체 인원의 20퍼센트 정도밖에 차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직급 순으로 위에서부터 배정을 받았는데요. 최근 MZ 세대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근로자 위원회라는 제도가 생기면서 왜 주차장을 상위 직급자만이 사용하게 하느냐는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따져보면 그 의견도 일리가 있죠.

논의 끝에 전 직원을 대상으로 주차권을 추첨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치러졌습니다.


저는 이제 나이가 먹은 탓에 주차장을 사용하던 상위직급자였는데요. 추첨 결과 뽑기에서 떨어졌습니다. 예비 68번이었어요. 제 앞에 67명이 주차권을 포기할 리 없으니 올해는 가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요즘 실외 공용주차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한 시간씩 회사에 일찍 출근합니다.


일과를 하시간 당겼더니 저의 새벽 루틴이 무너졌습니다.

새벽에 두 시간 정도 집에서 갖던 제 시간을 한 시간 잘라서 회사에서 보내려니 뭘 해도 발동이 걸리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성가시기도 하고 괜히 짜증도 났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아침을 보람차게 보낼 방법을 생각해봤는데요. 그런 불만을 일순간 달래준 요소가 커피였습니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아침 한 시간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제가 좋아하는 송도 커피에서 드립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커피숍에 들렀다가 출근하는 셈 치기로 한 거죠.


커피를 내리고, 향을 맡고 마시는 행동은 시간의 색깔을 바꿔 버렸습니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사무실에서 드립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이 시간이 설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사무실에서 드립 커피 마시면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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